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권오송작

새벽 세시쯤에 들어온 남자는 비틀거리며 구두를 벗었다.



동공이 적당히 풀어져 있었다. 꽤 취한 상태였지만 여기가 집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한쪽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자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린 채 손바닥으로 구두 뒤축을 잡아당겼다. 무게중심이 흔들린 상체가 잠시 기우뚱거렸고, 점성을 잃은 손바닥이 구두에서 미끄러졌다. 화가 난 남자가 갑자기 허공을 걷어찼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구두가 도자기 화병에 꽂혔다. 화병이 산산 조각나는 파열음에 집 전체가 들썩거렸다. 꽃받침에서 떨어져 나온 장미꽃들이 물방울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단잠을 놓치긴 했지만 크게 놀라진 않았다.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늘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술이 취했을 때 그가 내뱉는 말들은 말이라기보다는 괴성에 가까웠다. 내가 습득한 언어체계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외계어 같기도 했다. 남자는 방금 안드로메다은하에서 추방된 외계인일지도 모른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야생늑대처럼 울부짖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잠시 울부짖다가 꼬리를 말아 넣고 금방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취했을 땐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혼잣말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남자의 상반신을 올려다보며 물을 마셨다. 왜 그때마다 갈증이 나는지 나도 모르겠다. 늑대와 주술사, 오늘은 그 두 가지 케이스의 중간쯤 되어보였다. 나는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물을 마셨다. 남자도 나도 서로를 건들진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삼년 동안 어렵게 지켜 온 불문율이었다.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먹으로 거실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택시기사인 윗집 아저씨가 잠이 깬 것 같았다. 소리의 강도로 보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어느새 남자는 소파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움푹 팬 볼이 오늘따라 살점이 더 없어보였다. 처음엔 두 팔을 벌린 채 자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기 시작했다. 동이 틀 무렵에는 한 마리 공벌레처럼 머리와 다리를 완전하게 복부 쪽으로 말아 넣었다. 잠이 달아나버린 나는 혼자 거실을 어슬렁거렸다. 무료함이나 달랠까하고 거실바닥에 흩어져 있는 장미 꽃잎 위를 몇 번 뒹굴었다. 어항 속 엔젤피쉬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둘 다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상대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까부터 심드렁한 표정으로 모래를 삼켰다가 도로 내뱉곤 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하긴 남자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심 얼마나 놀랐을까. 이런 일은 아무리 겪어도 단련이 안 되는 법이다.

남자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처음엔 벌레만한 크기로 제 몸 속을 파고들더니 베란다 창문이 환해질 무렵에는 낡은 소파 위에 한 개의 점처럼 찍혀있었다. 나는 이 남자와 몇 년을 함께 살았다. 한집에서 뒹굴고 있다고 해서 모두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좋아서 이 남자를 따라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걷고 있었던 방향이 우연히 이 남자와 겹쳤을 뿐이다. 말하자면 둘이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내 운명을 결정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운명은 공복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루를 꼬박 굶은 3년 전 그날, 나는 갈림길에서 왼쪽 골목을 선택했고, 그때 한 남자가 군만두 냄새를 풍기며 내 앞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아침부터 무언가에 쫓기는 듯 허둥거렸다. 침착했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과 청 테이프를 두른 라면박스 몇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여자의 남편은 일주일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티브이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에는 빨간색 전표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어제 오후에는 선글라스를 낀 젊은 사내 두 명이 여자의 귀고리와 금반지를 거칠게 낚아챘다. 사내들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낄낄거릴 동안 여자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들이 돌아간 뒤 담배연기는 저녁안개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안개에도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사내들이 사라지자마자 여자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인 듯 했지만 여자의 말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대화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알아들었던 말은 딱 한 마디였다. 나는 듣지 말아야 할 말을 엿들은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개새끼! 어디얏.



여자는 정성스럽게 내 몸을 어루만졌다. 남편에 대한 화풀이라고 보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발버둥 치면서도 여자의 양 볼을 핥고 도톰한 가슴께를 파고들었다. 나는 여자의 젖가슴에 귀를 대고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는 나를 데리고 욕조로 들어갔다. 큰일을 치르기 전의 어떤 의식처럼, 옷을 벗기고 샴푸를 하고 몸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씻겼다. 여자의 부드러운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을 땐 나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그때마다 여자는 더욱 거칠게 나를 다루었다. 여자는 나를 씻기는 동안 개새끼, 개새끼, 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 말을 반복했다. 내가 움찔거리며 빤히 올려다보면 여자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여자가 갑자기 옷을 훌훌 벗었다. 알몸에 뜨거운 물을 한바가지 쏟아 부은 뒤 나를 안고 욕실을 나왔다. 여자의 맨살에 닿은 살갗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여자는 팬티만 입은 채 드라이기로 나를 말렸다. 나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자의 품에 안겨있었다. 12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여자의 체온으로 덥혀져 있는 상태라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후덥지근한 기운마저 들어 갑갑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자의 팔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주위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놀이터 같긴 한데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선 풍경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몇 올 남지 않은 오후의 햇빛을 저만치 밀어내고 있었다. 여자가 나를 땅으로 내려놓았다 서늘한 대지의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머리끝으로 올라왔다.



“우리 술래잡기 할까?”



여자가 미끄럼틀 기둥에 얼굴을 붙이며 술래 흉내를 냈다. 고개를 돌려 열까지 센 뒤 감았던 눈을 뜨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침의 우울했던 모습과는 달리 여자는 명랑해져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여자가 내뱉었던 ‘개새끼’라는 말에 대한 상처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누가 술래에요? 나는 여자의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먼저 술래 할 게. 니가 숨어.”



여자가 뒤돌아서 있을 동안 나는 숨을 곳을 찾았다. 놀이터에는 의외로 숨을 곳이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악한 미끄럼틀 하나와 그네 두 개,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가 전부였다. 이파리가 다 떨어져 버린 앙상한 몰골로 서 있는 느티나무들은 키가 커서 은폐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디에 몸을 숨기든 여자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 뼘 정도의 공간이 떠있는 미끄럼틀 밑으로 숨어들었다. 빨리 들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발견했을 때 환해질 여자의 미소를 떠올리며 다리 하나쯤 슬쩍 밖으로 내밀어놓고 싶었다. 어쩌면 나를 찾자마자 추위에 발그레해진 내 뺨에 얼굴을 비벼댈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대로 여자는 나를 쉽게 찾았다. 내가 꿈꾸었던 부비부비 같은 건 없었다.



“이번에 네가 술래야. 중간에 빼먹지 말고 열까지 정확하게 세야 돼.”



겨울 해는 너무 짧았다. 술래가 바뀌기도 전에 땅거미가 놀이터를 점령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이터는 아가미와 꼬리지느러미만 남겨두고 몸통의 대부분이 어둠에 먹혀버린 붕어빵 같았다. 보안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사물을 분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열까지 세었다. 마지막 숫자를 외쳤을 때 곤줄박이 한 마리가 겨울을 가로지르며 날아올랐다. 나뭇가지가 흔들거렸다. 새는 금세 어둠의 일부가 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끄럼틀과 정자 뒤편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놀이터 외곽까지 훑어보았지만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숫자를 잘못 셌나? 눈을 감고 1부터 10까지 다시 세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인적이 끊긴 놀이터는 유령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바람이 그쳤는데도 그네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끝이 쭈뼛거렸고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랫동안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왔다. 어딘가 꽁꽁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잠시 그네 옆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보안등 불이 켜졌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놀이터의 맨얼굴이 환하게 드러나자 여자가 여기에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길을 잃어버렸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여자는 지독한 길치였다. 평소에도 목적지를 찾지 못해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돌고 돌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완벽하게 자신을 엄폐해줄 무언가를 찾다가 방향을 놓치고 어디론가 멀리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직접 여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몇 시간을 돌아다녔는지 이제는 정신이 몽롱하다. 행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자정을 훌쩍 넘긴 것 같기도 하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놀이터를 나설 때부터 여태 먹은 게 없었다. 여자를 찾아 이 일대를 계속 돌아다녔으므로 피로와 공복이 겹쳐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를 생각하면 잠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눈앞에 양 갈래 길이 나타났다. 인생은 왜 언제나 선택을 강요할까. 오른쪽은 내리막길이었고 왼쪽은 언덕배기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쪽을 선택하면 저쪽 어디엔가 여자가 울고 있을 것 같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분명 잡채와 돼지고기가 뒤섞인 군만두의 고소한 향내였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군만두가 틀림없었다. 한 남자가 비닐봉지를 힘겹게 들고 비틀비틀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비닐봉지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끌려 남자 뒤를 따라갔다. 어차피 내가 왼쪽 길에 한발을 디딘 상태라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남자와 나는 우연히 방향이 같았을 뿐, 내가 줏대 없이 그 남자 뒤를 따라 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한 여자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조금 전 내 왼발이 언덕배기로 통하는 왼쪽 길을 선택했고, 동시에 웬 남자가 군만두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흔들며 내 앞을 지나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담벼락에 최대한 바짝 붙어서 걸었다. 때론 술래처럼 눈을 감고 걷기도 했는데 눈을 뜨면 비닐봉지가 코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사실 완전히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실눈이나마 희미하게 뜨고 있었다. 여자를 보지 못하고 지나칠까봐 나는 신경이 곧추서 있었다. 다세대주택 옆 불 꺼진 주차장이나 공터를 지날 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을 꿰뚫어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그 진원지에 귀를 바짝 세웠다. 소란의 대부분은 길고양이이거나 먹이를 뒤지고 있는 유기견이었다. 버려진 것들이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공포는 자동차나 인간이 아니라 공복이었다. 나는 치킨 뼈다귀를 물고 달아나는 길고양이를 보며 그네가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흰 벌레 같기도 했고 검은 벌레 같기도 했다. 벌레들은 젖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상승을 시도하다가 힘에 부친 듯 땅으로 내려앉았다.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첫눈이었다.



“너 이놈 집 나왔구나.”



남자가 발끝으로 나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나는 여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항변했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안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심지어 놀이터에서 여자가 내게 해주길 기대했던 부비부비를 하기까지 했다. 첫눈은 어느새 폭설로 변했고 발목까지 수북이 쌓였다. 남자는 머리에 달라붙은 눈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져 있었다.



“그 놈 참 예쁘게 생겼네. 지금부터 넌 내 룸메이트다.”



그렇게 남자와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벌써 삼년이 흘렀다. 남자가 내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은 없지만 밥과 물은 제때 챙겼다. 야단을 치는 일도 없었다. 내가 밥을 남기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걱정스럽게 눈만 껌벅거렸다. 사실 나는 그때 여자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그날 밤 서로를 찾아 헤매다가 길이 엇갈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여자에게 어떤 변이라도 닥쳤다면? 모든 게 내 책임인 것만 같아 가끔씩 식욕이 당기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대형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매장관리가 그의 주요 업무였다. 30대 초반에 결혼했지만 채 일 년이 못돼 이혼했고 아이는 없었다. 남자의 결혼이 왜 파국을 맞았는지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신접살림을 차렸던 20평대의 아파트를 전 부인에게 주고 자신은 지금의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변에서 남자가 이혼한 원인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의 불능을 의심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내의 낭비벽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지만 남자가 입을 열지 않는 한 모든 이유는 소문에 불과했다. 남자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이혼 후의 변한 모습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남자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 한 사람이란 몇 달 전부터 남자가 사귀고 있는 K녀였다. 30대 초반의 그녀는 외모 하나만으로도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원룸을 처음 방문한 날 찢어진 눈매와 뾰족한 하관을 보자마자 나는 K녀로 부터 멀리 떨어져 앉았다. 놀이터에서 나와 헤어진 여자와 정반대로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의 옛 여자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지 잘 알고 있어서 외모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K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데면데면하게 굴자 그녀도 나를 본체만체 했다. 4층 끝에 위치한 원룸은 지하가 아닌데도 일 년 내내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장롱 뒤쪽, 천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싱크대의 타일, 심지어 화장실 변기통 주변에서도 퀴퀴한 곰팡내를 풍겼다. K녀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늘 코를 틀어막은 채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거 곰팡이 냄새야 쟤 냄새야?”



K녀는 곰팡이 냄새가 내 탓인 양 남자를 몰아붙였다. 나는 그녀가 자고 가는 날엔 되도록이면 여자로부터 멀찍이 잠자리를 잡았다. 주로 베란다 쪽이나 신발장과 현관문 사이의 틈새에 끼어 불편한 잠을 청했다. 남자와 K녀는 만나기만하면 술을 마셨다. 주로 맥주와 소주를 안주도 없이 깡으로 마셨는데 월급날이면 고량주와 팔보채를 시키기도 했다. 그런 날은 나도 불어터진 오징어 몇 점을 맛볼 수 있었다. 남자는 술이 어느 정도 취하면 K녀의 다리를 쓰다듬고 드러누운 채로 블라우스 속에 손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남자는 금세 벽 쪽으로 등을 돌려 잠을 자는 시늉을 했다. K녀는 남자가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남자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파에서 잘 때 외에 남자는 절대 몸을 모로 세운 채 잠을 자지 않았다. 삼년동안 봐온 남자의 잠버릇은 그랬다. 그는 가자미처럼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잠을 잤다. 어떨 땐 죽었는가 싶어 남자의 코에 내 코를 가까이 갖다 댄 적도 있었다. 남자가 왜 K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혼자 남겨진 K녀는 때로 남은 술을 다 마셨다. 가끔씩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나를 노려보던 그녀의 불그레한 눈빛이 잊혀 지지 않는다.

보름 전쯤 드디어 일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소변이 마려웠는데 화장실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혀버렸다.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던 월요일이었다. 남자가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출근했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에 열려있던 화장실 문이 닫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문 안쪽의 잠금장치가 눌려져 있어서 밖에서는 열리지 않았다. 머리로 문을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광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사타구니 사이로 오줌이 찔끔찔끔 흘러내렸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괄약근을 꽉 죄었다. 남자는 평소보다 퇴근이 늦었다. 술이 잔뜩 취해 새벽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선택의 시간이 왔다. 나는 타일이 깔려있는 베란다에 오줌을 누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오줌이 쏟아질 것 같아 최대한 보폭을 줄였다. 베란다에 첫발을 디뎠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뒤축으로 바닥을 구르며 앞발을 살짝 내려놓는 걸음걸이. 본능적으로 그 발소리의 주인이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동시에 오므리고 있었던 괄약근을 놓쳐버렸다. 현관에서 거실로 올라오는 턱에 질펀하게 오줌을 쏟아버렸다.



“아악, 이게 뭐야!”



K녀의 단말마가 내 고막을 찢었다. 그녀는 팬티가 보일 정도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뒹굴어졌다. 정맥이 툭 불거져 나온 두 다리가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내가 싸놓은 오줌에 미끄러지면서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술병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K녀는 일어나자마자 현관에 세워져 있던 청소용 밀대를 들고 나를 내리치려고 했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비틀어 밀대를 빼앗았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닐봉지를 뒤져 깨지지 않은 1리터짜리 페트병 맥주의 마개를 딴 뒤 선 채로 술을 마셨다.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룸메이트였으므로 화를 삭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떡할 거야?”



K녀가 입에 가져가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스타킹을 벗은 발목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여자의 악다구니에도 남자는 말없이 육포만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빈 맥주병이 기울기가 다른 바닥을 굴러다녔다. 우리가 사는 원룸은 날림으로 지어져 바닥의 기울기가 제각각이었다. 화장실 쪽으로 쓰러진 맥주의 주둥이에서 남은 맥주가 소변처럼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남자가 K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오늘처럼 괴로워하는 남자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남자는 진짜 K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약간의 질투와 우울감에 휩싸였다. 남자는 내 룸메이트였으므로. 나는 두 사람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파 귀퉁이에 얼굴을 처박고 자는 척 했다. 뒤통수에 여자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이튿날부터 남자는 매일같이 새벽에 귀가 했다. 늘 만취상태였다. 그동안 일주일에 2,3일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나는 남자의 행동변화가 궁금했지만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아무리 술에 찌들어있어도 내 밥과 물은 꼬박꼬박 챙겼다는 것이다 남자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룸메이트, 언제 떠올려도 듣기 좋은 말이다. 때론 외국어가 우리말보다 더 정겨울 때가 있다.

눈이 끊임없이 퍼붓고 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았다. 티브이는 하루가 멀다고 폭설이나 대설주의보에 대한 주의사항을 떠들어댔다. 남자를 만난 지 벌써 만으로 3년을 넘겼다. 우리는 룸메이트로서 나름 정이 들었던 것 같다. 특별한 애정 없이도 서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남자가 무난한 성격을 가진 룸메이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성이었다면 편안함이 점차 사랑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남자가 좋아지고 있었다. 술이 취했을 때 남자가 내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응? 응? 하고 바보처럼 몇 번이나 되물었던 것처럼, 나도 남자가 술김에 뱉어내는 외계어 정도는 이제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남자는 어젯밤 마신 술이 덜 깬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열시가 넘었는데도 남자는 출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비번이라면 괜히 나만 머쓱해질 뿐이다. 지난 번 사건이후로 나는 되도록이면 말수를 줄였다. K녀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내게 꽃무늬 팬티를 들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종종 목숨을 건다. 나 때문에 둘이 헤어졌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틀 전에도 술이 잔뜩 취한 여자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남자 역시 술이 취해 있었으므로 나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에 금이 가지 않기를 속으로 바랄 뿐이었다. 새벽녘까지 계속된 통화는 결국 남자가 핸드폰을 던져버림으로써 끝이 났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배터리가 몇 번의 불규칙 바운드를 거쳐 내 앞에 멈춰 섰다.



“잠깐 산책이나 하고 오자.”



남자가 나를 차에 태웠다. 오랫동안 세워져 있던 차 안은 냉장고 같았다. 남자는 평소 걸어서 직장에 갔다. 마트가 도보로 십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차를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비정규직이라 따로 주차할 공간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차 안 공기가 데워질 때까지 시동을 켜 둔 채로 가만히 있었다. 한 번씩 별 이유도 없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윙윙거리는 엔진의 진동음이 시트를 통해 몸 전체로 전달되었다. 눈이 그친 이면도로는 차갑게 얼어있었다. 승용차들이 거북이걸음으로 기어 다녔고, 언덕길을 내려가던 소형 트럭이 균형을 놓치고 전봇대를 들이 박았다. 운전수가 뒷목을 움켜잡고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변속기를 주행으로 옮긴 뒤 가속페달에 얹어놓은 오른 발에 힘을 주었다. 노면은 바퀴를 움켜쥔 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가 변속기를 주행모드에서 후진으로 바꾸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바퀴를 그러쥐고 있던 노면이 악력을 풀었고 차는 기우뚱 거리며 뒤로 후진했다. 차창 밖으로 하얀 풍경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올라탄 차는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차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얼어있던 노면은 대부분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차는 JC를 통과해 지방 국도로 들어섰다. 나는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 남자는 시선을 차 전방에서 떼지 않은 채 손만 뒤로 내밀어 호주산 육포를 건네주었다. 나는 육포를 바라보기만 했다. 실은 아까부터 속이 더부룩해서 남자에게 차를 세워달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차는 십 분을 더 달렸고 이심전심이었는지 남자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국도변의 간이 휴게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건물은 을씨년스러웠다. 시멘트로 거칠게 마감된 휴게소 마당은 어느새 눈이 녹아 걸음을 뗄 때마다 질퍽거렸다.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한쪽 귀퉁이가 찢어져 있어 간당간당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남자는 나를 데리고 화장실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건물 뒤편이었다. 나는 남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왜 갑자기 술래잡기 놀이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와 술래잡기를 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여자. 내가 숫자를 천천히 세지 않았더라면, 여자는 놀이터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여자는 길을 잃지 않았을 텐데. 나는 심한 자책감에 몸을 떨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가 남자의 얼굴을 뿌옇게 가렸다. 남자는 한참동안 나를 등 진 채로 서 있었다. 그것은 술래의 자세였다. 고개를 돌리기 전에 얼른 숨어야지 라는 메시지를 내게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아저씨가 술래하세요.”



나는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앞 쪽으로 끄덕거리는 고개가 보였다. 이 남자가 눈을 뜨기 전에 어디엔가 빨리 몸을 숨겨야 한다. 쉽게 찾아버리면 내가 술래가 되어야 하므로 남자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최적의 은폐장소가 필요했다. 여자를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나는 술래가 몸서리쳤다. 나는 최대한 으슥한 공간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 폐타이이와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있는 어둑어둑한 공터가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걸었다. 내가 숨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면 어쩌지. 발걸음을 뗄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도돌이표처럼 나는 속으로 셌던 숫자들을 반복적으로 다시 세기 시작하며 나는 술래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내가 비스킷을 한 조각 삼켰을 때 철커덕하고 문이 닫혔다. 나는 폐타이어 더미 속을 파고들었고, 술래가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꺼풀이 감겼고, 나는 놀이터에서의 그 여자처럼 길을 잃어 버렸고, 술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먼 곳으로 걸어갔고, 내가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어디선가 향긋한 과자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육포 냄새와 비슷해 고개를 슬쩍 들이 밀었을 뿐인데, 그때 굉음을 내며 철장 문이 닫혔던 것이다.

남자와 함께 타고 왔던 차보다 더 큰 차를 타고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한 곳에는 나처럼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 온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녀석은 여전히 술래처럼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어떤 녀석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어두운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술래놀이가 시큰둥해진 몇몇 친구들은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간혹 남자와 여자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친구들은 술래놀이중인 것도 잊어버리고 함부로 얼굴을 보여주었다. 친구들은 술래놀이의 규칙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술래와 숨는 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그것이 술래놀이의 묘미인데, 숨는 방법도 숫자를 세는 법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은 들키는 자와 들키지 않는 자로 나뉘어졌다. 술래에게 들킨 친구들은 술래를 따라갔다. 술래들은 친구들을 차에 태우고 사라졌다. 들키지 않는 친구들도 열흘마다 사라졌다. 나는 두 번의 술래놀이를 통해 어떻게 하면 술래에게 들키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온 열흘 동안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숨을 곳이 별로 없었는데도 나는 들키지 않았다. 술래들은 눈도 감지 않고 우리를 찾아다녔고, 술래놀이에 가장 적합한 친구들만 골라서 데려갔다. 그 친구들은 대부분 장난감처럼 조그만 했고 예쁘장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열흘 동안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날씨가 화창했다. 우리들은 햇볕을 쬐며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몇은 뒹굴면서 몸을 그을리고, 몇은 제 그림자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잠시 후 구름이 해를 가렸고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먼저 들어간 친구들은 대낮부터 잠에 취해 있었다. 갑자기 갈증이 났지만 마실 물이 없었다. 그때 여자와 남자가 기억났다. 내 애인이었던 여자와 룸메이트였던 남자. 지금도 나를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울부짖을 것 같은 여자. 술이 취하면 나를 부둥켜안고 내 볼에 부비부비 하던 남자. 그들과 다시 한 번 술래잡기를 하고 싶었다.

언젠가 룸메이트였던 남자와 함께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데드맨 워킹. 범죄자인 듯한 남자가 감방을 나와 천천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 잠시 후 그 남자의 양팔에 수갑이 채워지고 주사기가 정맥 속으로 꽂히고, 주사기 속으로 색깔이 다른 액체들이 차례대로 주입되는 장면. 나는 그 중 장밋빛 액체가 제일 궁금했다. 그 주사 맛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마른 입술을 빨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깜깜한 방안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사기 필름이 스르륵 스르륵 돌아가며 잔상과 잔상을 이어주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어떤 아저씨가 화면에서 걸어 나와 억센 손으로 내 양팔을 꽉 잡았다. 다행히 영화 속 그 사내에게처럼 수갑을 채우지는 않았다. 나는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편안하게 팔을 맡겼다.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어떤 여자가 빠르게 몸을 숨기는 장면이 잠시 어른거리다 사라지고, 어떤 남자가 나를 등진 채 뒤돌아서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우유를 데운 듯한 따뜻한 액체의 느낌이 팔을 통과해 서서히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술래처럼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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