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권오송 작품.

당신 엄마잖아. 남편의 말에 은재는 드립포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 삶에 그런 존재는 없다고 했지! 은재는 한 음절씩 힘주어 말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 시키기 위해 아일랜드 식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와우, 그럼 나의 누나는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남편 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 손을 펴 보였다. 난 모르는 사람이니까, 저지른 사람이 책임져. 은재는 환을 노려보며 말했다. 날 선 분위기를 농담으로 눙치려는 태도도 마뜩치 않았다.

나도 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미팅이 잡힌 거라고 했잖아. 중요한 고객이라 변경할 수 없어. 환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핸드폰을 챙겨들었다. 한인 마트에 3시 도착, 차는 두고 출근하니까 늦지 마세요. 환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날아왔다. 난 절대 안 가. 못 가. 은재는 비명처럼 외쳤다.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미쳤어, 미친 거야. 마주치는 것도 끔찍한데 마중이라니. 은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가 치밀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거실을 몇 바퀴 돌았는데도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창문을 기웃거리는 침엽수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화단 사이 조붓한 길에 은발의 여자가 검은 개를 앞세우고 걸어가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쯤이야 아랑곳 않는 느린 걸음이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 되었을까. 은재는 환의 말을 건성으로 넘긴 게 화근이지 싶었다. 당신...... 보고 싶어 하잖아. 그때 당신 뒤에 오는 조사가‘당신이’인지‘당신을’인지, 보고 싶어 하는 주체를 따지지 않고 흘려들었다. ‘이’는 절대 아니었다. 만일‘을’이라면 더욱 불쾌했다. 그럴 리 없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휴무라 느긋하게 일어났다.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환의 말에 은재는 긴장했다. 일상은 물론이고 주변의 공기조차 미동이 없기를 바라는 즈음이었다. 들뜬 마음을 숨기고 있어 소소한 선물도 부담스러웠다. 장모님이 벤쿠버행 비행기를 탔다는 말에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새엄마가 올 리 없었다. 그렇다면 아빠가 연락했을 것이다. 행여 그렇다고 해도 선물은 아니었다. 아, 그 장모님이 아니라 당신 친엄마. 은재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친엄마라는 말이 생경스러웠다. 영어권에서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그녀의 근황을 환이 어떻게 알지, 게다가 그녀가 여길 왜 온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놀랄 줄 알았다는 듯이 환이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빠가 알려줬다며, 그녀가 친구들과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시애틀을 거쳐 벤쿠버와 로키를 여행하고 다시 시애틀로 가서 귀국하는 여행코스라는 것이었다. 리얼리? 얼결에 영어가 나왔다. 리얼! 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일행과 떨어져 벤쿠버에 더 머물고 싶다는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난 관심 없어. 벤쿠버가 내 땅도 아닌데 알 게 뭐람. 은재는 오빠에게 화가 치밀어 건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환에게 그녀를 연결 시켜줬냐고 따질 요량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때 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 보고 싶어 하잖아. 한국은 깊은 새벽이었다. 그래도 통화하기를 눌렀다. 받지 않았다. 깊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오빠 미쳤어? 깨면 바로 통화해. 메시지를 남겼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당신도 두 번 다시 연락 하지 마. 은재는 단호하게 소리치곤 화장실로 가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거울 속에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서 있었다.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 노려보았다.



한인 마트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은재는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평소 주차장에 들어서면 잔잔한 바다를 보듯 좋았던 것과 달리 거센 파도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벤쿠버 시내에서 떨어진 랭리에 살면서 즐겨 찾은 곳은 마트나 쇼핑 몰의 주차장이었다. 지상의 넓은 주차장에 주차하기란 식은 죽 먹기여서 한국에서 서툴렀던 운전이 완벽해졌다. 더불어 삶도 그런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마트로 차를 몰았다. 마트를 무슨 놀이공원에 가듯 좋아하냐고 환이 놀릴 정도였다.

입구에서 먼 한적한 자리에 주차한 은재는 천천히 마트로 향했다. 비가 내려 서둘렀는데 그 새 비는 그치고, 버스 도착 시간까지 여유가 생겼다. 카트를 밀며 매장을 돌았다. 파프리카 감자 당근 등이 쌓여있는 야채 코너를 지나자 멸치와 김 등의 건어물이 보였다. 고향 만두와 돈가스로 채워진 냉동 칸 옆에는 한글로 쓰여 있는 스낵봉지가 즐비했다. 신라면과 진라면이 탑처럼 쌓여있는 옆을 지나면서 은재는 진저리를 쳤다. 한국인 듯 착각이 일었다. 환과 함께 처음 한인 마트를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착각이었다. 그때는 신기했으나 지금은 두려웠다. 마중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은재는 황급히 육류코너로 향했다. 생각할수록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정작 오빠도 놀라워했다. 엄마가 거기를? 김 서방 번호를 아냐고 물어 단순히 안부만 주고받을 줄 알았어. 한국이 아니라서 용기를 냈나? 은재는 오빠의 말에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한국이나 밴쿠버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 어디에서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도망치듯 떠나온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환을 선택한 것이었다.

환은 한국에 온 지 오래 되어 곧 영주권이 만료된다며 심란해했다. 이번에 밴쿠버로 돌아가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는 환에게 은재는 같이 가겠다고 했다. 환의 표정이 환해졌다. 환과 손깍지를 끼고 탄 비행기 안에서 세 번째 기내식으로 나온 햄버거를 겨우 한 입 베어 물고 말았다. 한 살 연상이 흠은 아닐까, 부모님의 이혼이 걸림돌이 되면 어쩌나, 비행시간이 줄어들수록 걱정은 늘어났다.

어른들은 반갑게 맞았지만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서 대기업을 다니던 잘 나가는 직업을 가졌던 여기서 시작할 때는 다 같다고 했다. 일자리가 많으나 고된 일이고, 물가도 높아 주거비 지출이 크면 두 사람 수입으로 평범한 삶을 살기란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주거 문제는 한국이든 외국 어디든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은재는 두렵지 않았다. 거세게 반항하는 환을 어르고 달래 연애만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자고 했다. 그리고 인천 공항 행 비행기 티켓을 찢었다. 달랑 캐리어 하나 끌고 왔지만 집이나 직장에 미련이 없었다. 주택문제를 해결하려고 환과 머리를 맞댔다. 둘 다 모아 놓은 결혼 비용은 없었다. 카페만 가지 않았어도, 치맥만 참았어도, 둘이 번갈아 쌓은 후회의 벽돌은 성을 이뤘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모기지로 콘도형 주택을 구입하고 결혼식은 간소하게 했다. 아빠와 새엄마, 대학생인 동생만 하객으로 왔다. 오빠는 바쁘다며 다음에 와보겠다고 했다. 환은 부모와 형네 부부를 포함해 스무 명을 초대했다. 신혼여행은 생략했다. 서울서 온 세 사람은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와 그냥 가기 아깝다며 밴쿠버 곳곳을 여행했다.

매장을 두 바퀴 돌았는데도 선뜻 손이 가거나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냉장고가 텅 비어있어 무엇인가를 사야 했다. 먹고 싶을 때 바로 먹을 수 있게끔 냉장고를 채워놓자는 환의 말을 은재는 콧등으로 들었다. 환은 부모님이 늘 바빠 냉장고가 꽉 차있으면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은재는 달랐다. 먹거리로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 숨이 탁 막혔다. 엄마가 밤이 깊어야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버스 도착 시간이 가까웠다. 은재는 카트를 거칠게 밀어 눈에 띄는 제품들을 마구 담았다. 두부와 김, 숙주나물, 냉동만두, 3분 카레와 데우기만 하면 되는 육개장과 미역국, 라면묶음들이 카트에 앉아있었다.



대형 버스 문이 열리고 모자를 쓴 남자가 내렸다.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뒤를 이었다. 얼핏 보니 그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차림이 화사했다. 은재는 입술을 깨물며 가이드 명찰을 목에 건 남자에게 다가가 마중 나온 사람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는 도착이 늦어 죄송하다며 그녀의 이름을 댔다. 은재는 작은 소리로 맞는다고 했다. 그러자 버스에서 내린 여자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은재냐고 물었다. 은재는 시선을 떨구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그녀의 일행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순식간에 일행이 빙 둘러섰다. 엄마를 잘 부탁한다, 딸 보러 일부러 먼 길을 왔다, 누가 봐도 모녀인 줄 알겠다, 이런저런 말들이 두서없이 날아왔다. 은재는 당혹스러웠다. 호기심으로 번득거리는 눈빛에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캐리어를 앞세우며 다가왔다. 그녀는 일행을 향해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일행에게 탑승하라고 가이드가 외쳤다. 그녀와 일행은 이별의 아쉬움을 반복적으로 나누었다. 은재는 덩그러니 서 있는 캐리어를 차에 실으면서 나오지 않았어도 괜찮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일행들이 휑한 주차장에 그녀만 남기고 떠났을 것 같지 않았다.

김 서방은 안 왔네, 보고 싶었는데. 마트 주차장이 지상에 있으니 얼마나 좋아. 넓기까지 하니 정말 부럽네. 여기도 외국인들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구나. 밴프도 한국 사람들 천지던데. 너희도 가봤겠지만 레이크 루이스, 연두 빛 물빛이 환상적이었어. 빙평선이라고 아니? 수평선 지평선은 들어봤어도 빙평선은 이번에 처음 들었어. 수목성장한계선이라던가, 나무들이 살지 못하는데 그 라인을 빙평선이라 부른다던가....... 산이 깊다보니 불이 나도 끄지 않고 자연적으로 진화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고 하니, 여기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 같아. 살다보니 수억 년 된 빙하도 밟아보고. 크레바스라고 들어봤지? 눈으로 보이는 틈새는 좁아도 깊이를 알 수 없어 빠지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크레바스도 괜찮은 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뭐니. 어머, 거리에 사람이 없네. 집들이 정말 그림 같이 멋있네.

은재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동을 걸자마자 쉼 없이 쏟아지는 목소리를 차단하고 싶었으나 조용히 하라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라디오를 켰다. 음악이 나오는 채널로 주파수를 맞췄다. 라디오도 듣고, 영어는 잘 하겠네. 난 영어를 못해 여기서 살라고 해도 못 살겠다. 하마터면 은재는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을 볼 뻔했다. 차선을 바꿀 때도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백미러 대신 양 사이드 밀러만 보았던 것이다. 라디오 볼륨을 높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여길? 그러면 나는 미국, 아니 더 멀리 브라질로 간다.



튀김옷을 입고 빵가루로 치장한 새우들을 기름 솥으로 던졌다. 기름 끓는 소리가 요란했다. 침입자를 밀어내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새우가 꼬리를 붉히며 저항했다. 태울 거요? 사장이 팔꿈치를 툭 쳤다. 은재는 화들짝 놀라 집게로 새우를 건져냈다. 튀김 새우가 담긴 그물망 소쿠리를 딱딱 쳐 집요하게 달라붙은 기름을 털어냈다. 노랗게 튀겨진 감자와 붉은 당근 옆에 새우 다섯 마리를 눕혔다. 서빙 정이 튀김 접시를 쟁반에 올려 홀로 내갔다. 사장이 붉은 알로 둘러 싼 롤을 썰어 두툼한 나무 판 위에 비스듬히 눕혔다. 은재는 생 와사비가 든 짤 주머니를 사장에게 건넸다. 사장이 짤 주머니를 신중하게 조였다 풀자 초록 이파리가 솟아났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롤이 싱그러운 꽃으로 활짝 폈다. 서빙 정이 엄지 척을 하며 완성된 음식을 들고 나갔다. 우동과 함께 주문한 스시는 사장의 몫이었다. 은재는 핫 푸드 메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으나 롤을 말기에는 부족했다. 주 메뉴인 캘리포니아, 다이너마이트 롤은 흉내 내는 수준이었다. 은재는 다 끓은 우동을 그릇에 옮겨 담고 썰어놓은 파 한 스픈을 그 위에 뿌렸다.

화이트보드에 붙어 있는 주문서는 없었다. 은재는 고개를 내밀어 홀을 살폈다. 음식을 먹고 있는 손님의 우람한 등판이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서빙 정이 재바르게 카운터로 향했다. 손님은 카드를 내밀면서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였다. 팁 3불을 계산에 포함하라는 뜻이었다. 문득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불과 1년 전만해도 팁은 테이블 위에 동전으로 놓여있었다.

결혼 후, 환이 먼저 취업 했다. 은재는 놀고 있을 수 없었다. 영주권이 없는데다 영어로 대화할 실력이 아니어서 일자리가 한정적이었다. 이동거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차는 환이 타고 다녔다. 차 두 대를 굴릴 형편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스시집에 자리가 있었다. 서툰 영어로 주문을 받고 완성된 음식을 테이블로 내가는 일이었다. 빈 그릇 옆에 팁으로 놓은 지폐나 동전을 보면 기분이 묘했다. 어느 순간 머쓱함이 덜어지고 팁이 두둑한 날은 퇴근길이 가벼웠다.

한국에서 오는 손님은 힘들어. 대단한 접대를 기대하는데 우린 먹고살기 바쁘거든. 사장이 칼을 들고 다가오며 말했다. 사장은 자신의 전용 칼을 소중히 다뤘다. 누구도 함부로 만질 수 없었다. 사장이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섰다. 칼을 씻으려는 것 같아 은재는 도마를 씻으며 옆으로 반걸음 옮겼다. 며칠 계시지? 5일이요. 친척? 아뇨, 오빠를 낳은 사람. 은재는 사장에게는 솔직하고 싶었다. 저런, 어머니가 오셨는데 계속 근무한 거야? 사장이 나무라듯 말했다. 하루만 쉬어도 되요. 이혼하고 떠난 사람이에요. 은재는 사장이 놀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놀란 사장의 표정을 그릴 수 있었다. 미간을 모으고 눈을 크게 떴으리라. 조금은 우스운 표정이지만 곧 미간이 풀리고 온화해질 것이다. 그럴수록 함께 해야지, 귀한 시간인데 이렇게 보내는 건 아니지. 사장의 목소리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데 제멋대로 나타났어요. 은재는 담담히 말했다.

서빙 정이 주문서를 내밀며 30분 후 픽업, 이라고 외쳤다. 전화로 주문하여 가져간다는 뜻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투고(to go)로 더욱 분주할 것이다. 퇴근길에는 대부분 음식을 포장해 갔다. 은재는 주문서를 받으려고 몸을 돌렸다. 사장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사장이 양손을 펴 보이며 환히 웃었다. 은재는 얼굴을 붉혔다. 이십대 후반에 벤쿠버로 왔다는 사장은 사십 중반이었다. 스시 집을 차리고 결혼하여 아이가 둘이 되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하는데 풍기는 분위기는 학구적이라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란 사람 같았다. 인상보다 목소리에 마음이 무장해제 되었다.

서빙 일에 지쳐갈 즈음에 영주권이 나왔다. 영주권이 빨리 나온 편이라며 시어른들이 좋아했다. 은재는 좀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빙 일을 그만 두었다. 영주권이 해결 되고나니 언어가 문제였다. 스시 집에서는 손님들과 간단히 대화했고,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다. 환과 주고받는 짧은 영어로는 실력이 늘지 않았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는 요원했다. 부족한 영어로 할 수 있는 일을 스시집 밖에 없었다.

은재는 단순하게 일만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는 상가건물마다 치킨 집이 있듯이 여기는 스시집이 있다. 타운형 주택이나 콘도형 주택단지의 몇 블록 언저리에는 상가 구역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은 같은 건물에 스시 집이 두 군데나 있었다. 거의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스시 집은 요리사 자격증이 있어야 창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시는 주로 연어였고 모든 식재료들은 해당업체에 주문하면 배달되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회와 달랐다. 대부분 연어와 참치였고, 메뉴도 캘리포니아 롤 류와 튀김, 라멘 우동 등 간단했다. 4인 테이블 대여섯 개 정도의 작은 규모라면 환과 둘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동차 영업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스시 집은 내켜하지 않았다. 물론 가게 임대할 자금도 턱없이 부족해 언제 시작할지 요원했다. 그래도 은재는 주방 일을 배울 수 있는 스시 집을 찾았다. 이곳에서 벌써 튀김 같은 핫 푸드를 조리과정은 마쳤다. 롤을 말고 스시를 요리하는 과정까지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홀이 시끄러웠다. 서빙 정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이 연어 스시를 만들면서 소동에 귀를 기울이는 걸 본 은재는 젖은 손을 앞치마로 닦으며 홀로 나갔다. 서빙 정은 두 손을 모으고 손님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검은 머리에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자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서빙 정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라멘이 핸드폰의 그림과 다르다고 저러는 거라고 했다. 은재는 주방으로 들어와 주문서를 봤다. 주문한 라멘이 맞았다. 다시 끓여. 사장이 말했다. 손님이 아니라면 아닌 거야. 똑같은 거라고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소용없어. 다시 끓여주면 사진과 같아 보일거야. 삶은 주관적이거든. 사장은 초월한 듯 덧붙였다.

출입문에 마감 푯말을 건 서빙 정이 두 팔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노동이 끝난 즐거움을 표현해야 입에 가시가 돋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은재는 주방을 정리했다. 홀 정리는 서빙 정의 몫이었다. 사장은 남은 재료를 파악한 후, 매출 전표를 뽑고 팁을 계산할 것이다. 팁은 홀과 주방이 6대 4로 나눠 당일 계산이었다.

서빙 정은 팁이 두둑한 날은 가게 문을 나서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스물여섯,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어 비행기를 탔다며, 낳고 길러주신 분들보다 홍대 앞 밤거리가 더욱 그립다며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다. 저 앳된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묵은 노래가 나오는지 미스터리한 1인이라고 사장이 놀렸다. 그러면 은재는 장단을 맞췄다. 다음 내리실 역은 홍대 홍대 앞입니다, 이어 어설픈 영어로 그리고 중국어 비슷한 발음을 쏟아냈다. 사장은 미스터리 2인이 여기 있다며 놀란 시늉을 했다. 은재씨도 홍대가 그리워? 사장의 물음에 은재는 네버, 절대 노, 라고 손까지 저어가며 부정했다. 7년 전으로 돌아가 서빙 정의 나이가 되었다고 해도 아니었다. 방황은 지겨웠다.

언제부터인가 서빙 정의 노래가 바뀌었다. 혼자서는 밤이 너무 너무 길어요, 아 당신은 무정한 사람. 몇 달째 퇴근 후 혼자 지내야 하니 저런 노래가 나오지 싶어 은재는 조용히 웃을 뿐 홍대 행 전철을 타지 않았다. 사장 앞에서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설렘이 쌓였다.



차에 타자마자 은재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쇼핑백을 무릎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쇼핑백에 든 음식이 소중한 건 아니었다. 종일 혼자 계셨을 텐데 빈손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며 직접 조리해 포장까지 해준 사장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을 뿐이었다.

전등이 꺼진 가게의 출입문을 잠그는 사장의 뒷모습이 보며 해별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마감시간에 맞춰 온다고 환이 연락했을 때, 알았다고 할 생각이었다. 사장의 차로 퇴근하지 못해 아쉬웠다. 장모님도 같이 갈 거 같아. 일하는 곳이 궁금하다고 하시네. 이어 날아온 메시지에 은재는 곧바로 답을 보냈다. 벌써 마감 했어, 곧 갈 거니까 오자마.

사장은 시동을 걸었다. 은재는 몸을 곧추세우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단층인 상가건물은 길게 늘어선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아 새어나오는 불빛이 없었다. 하늘조차 어스름해 건물은 더욱 우중충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어둠은 그늘에 숨어 몸을 사렸다. 백야였다. 낮과 밤을 나누는 건 빛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차는 주차장을 벗어났다. 주택가인데도 차들만이 드물게 지나가고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에 활짝 피었던 작약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다. 창밖으로 공원이 다가왔다. 잔디밭에 엎드려 있는 키 낮은 침엽수의 둥근 몸피가 봉분처럼 보였다. 공원묘지를 지나는 듯 오싹했다. 키 큰 가로등은 밤길을 지켜주지 않았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이 나왔다. 숲은 백야를 거부했다. 사람이 지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그물을 던지듯 어둠과 적막을 풀어놓을 것 같았다.

차의 속력은 느렸다. 집으로 가는 1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사장은 가게와 집과 무관한 얘기를 했다. 은재 또한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시간들을 스스럼없이 풀어놓았다. 지난날과 앞날의 어느 하루를 공유하는 재미는 컸다. 차 안에서의 시간이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걸 은재는 알았다. 즐거움으로 압축된 시간이었다.

콘도형 5층짜리 건물 앞이 가까이 다가왔다. 은재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벼운 고개 짓은 한 후, 차문을 열었다. 은재는 스시가 든 쇼핑백을 두 손으로 잡고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았다. 두 블록 더 가면 사장도 집에 들어갈 것이다. 현관문을 열면 아들 둘이 그 누구보다 앞서 달려 나올 집으로.



식탁에 밥상이 차려졌다. 불고기와 달걀말이, 김치와 오이무침이 정갈했다. 불고기와 오이는 냉장고에 없던 재료였다. 은재는 연어 회와 스시를 풀어놓았다. 환은 황홀한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밥상이라 반가울 터였다. 시금치국을 밀어주며 배고플 텐데 어서 먹으라고 그녀가 권했다. 은재는 허기졌지만 먹고 왔다고 둘러댔다. 환의 눈길이 느껴졌다. 믿기 힘들다는 눈빛이었다. 퇴근이 이른 환은 언제나 은재를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

국이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그녀가 수저를 들며 말했다. 아주 맛있습니다. 이건 은재가 만들었어요. 맛보세요. 환이 연어 회와 스시를 그녀 쪽으로 밀며 은재의 눈치를 살폈다. 롤을 말을 순 있지만 스시를 요리할 수준이 아니라는 걸 환도 알고 있었다. 은재는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그녀와 은재 사이에서 쩔쩔매는 환을 위해서였다. 분위기는 미적지근한데 밥은 따듯했다. 연어가 탱글탱글 맛있네. 대단한 솜씨야. 언제 이런 걸 배웠대?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은재는 눈짓으로 환에게 대답을 넘겼다. 환은 음식이 입안에 가득해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과장되게 음식을 씹었다. 알래스카가 가까워서 그런지 연어가 아주 탱글탱글하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방이 춥진 않으세요? 환이 물었다. 난방을 올리니까 잘만하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 방에서 나올 때 두 팔을 엇갈려 팔뚝을 잡는 모양새가 춥게 잔 것 같아 은재는 방에 있는 이불을 챙겨 환에게 주며 건네라고 했던 것이었다. 진작 챙겨 드릴 걸 그랬나 봐요. 그녀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환이 건네는 이불을 받았다. 이젠 이걸로 충분해. 은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는 침대 문화라 애초 바닥에 온기가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환이 답답했다. 여기 사람들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는다, 그나마 거실 바닥이 나무여서 냉기가 덜하다는 말도 보태면 좋으련만 환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에 두터운 카펫이 깔려있고, 난방으로 온도 조절이 가능한데다 시댁에서 가져온 두터운 이불이 있어 괜찮을 줄 알았다. 6월이지만 아침저녁으론 이른 봄 정도의 쌀쌀함이 느껴졌다. 비가 잦은 것에 비해 습기가 거의 없어 해가 쨍쨍 나도 살에 달라붙는 온기를 느끼기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투명하고 건조함에 익숙해졌다. 호텔 알아봐요. 은재는 환에게 말했다. 이틀이면 가는 데 뭘. 그녀는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팝에 사람이 많았다. 예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캐나다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음식점으로 모셔야 한다며 시어머니가 정한 장소였다. 시아버지는 안사돈이 불편할 거라며 참석하지 않았다. 메뉴는 시어머니와 환이 선택했다. 캐나다에서 반드시 맛 봐야 하는 음식은 스테이크와 햄버거라고 했다. 웨이터가 굽기 정도와 소스를 구체적으로 물었고, 환이 한국말로 되물었다. 겨우 네 사람인데도 취향이 제각각이라 주문하는 과정이 어수선하고 복잡했다. 은재는 앉은 자리가 불편해 정신이 혼미했다. 시어머니가 환을 옆에 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음식이 순차적으로 나오기까지 긴 시간 동안 억지웃음으로 버틸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양쪽 어른들이 인사하는 자리가 오히려 편안했다. 아빠와 새엄마는 형식적이었으므로. 은재는 그녀와 함께하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낳아주신 분이라 대접하는 게 도리라는 시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먼 곳에 오셨는데, 혼자 계셔야 하니 갑갑하셨지요? 시어머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애들이 열쇠를 줘서 산책도 했어요. 하루는 동쪽, 다음 날은 남쪽으로 쭉 걸어갔다가 그대로 되돌아오고 그랬어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낯선 곳인데 대단하시네요. 시어머니의 호응에 신명난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길가 화단이 잘 꾸며져 있어요. 잔디밭에 토끼도 뛰어다니는 걸 봤어요. 숲이 우거져 뱀이 나올 것 같던데 여기도 뱀이 사나요? 그녀는 두렵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어머니는 당황한 기색으로 뱀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은재는 그녀가 점잖게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뜬금없이 뱀이라니, 은재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환에게 말을 걸었으나 별 대꾸가 없었다. 옆 테이블에서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여행에 대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재는 음식이 빨리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파리보다 베네치아가 훨씬 낭만적이었고, 여행 리스트에 캐나다는 들어있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강력 추천하는 바람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로키의 풍경을 늘어놓았다. 사계절 어느 때 가도 환상적일 거라며 어느 철에 가봤냐고 물었다. 우리는 아직 못 가봤어요. 서울 사람들이라고 다 남산을 가본 건 아닌 것처럼 말이에요. 시어머니는 멋쩍어 하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도 남산 케이블을 우리 은재 유치원 다닐 때 타 본 게 전부에요. 은재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몸을 곧추세웠다. 하마터면 고개를 틀어 노려볼 뻔했다. 우리 은재라니, 이제 와서.

이민 와 고생한 이야기가 나오자 환이 끼어들었다. 제가 여덟 살 때였으니까 25년쯤 되었어요. 큰 의지가 된다는 듯 시어머니가 환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뗐다. 그이는 영어를 잘했는데 저는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미용 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지요.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 순간 아들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지 뭐에요. 시애틀로, 한국으로.

환은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고 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악착같이 공부했으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살 것 같았다며,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치맥하는 즐거움이 최고라고 했다. 빈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하면서. 은재는 빈집에 들어가는 환이 무척 부러웠다. 이혼한 아빠는 2년이 채 되지 않아 첫사랑이었다는 동창생과 재혼했다. 3세 살짜리 딸과 함께 새엄마가 들어왔다. 거실은 동생이 차지했고, 아빠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와인과 스테이크가 나왔다. 환이 와인을 잔에 따랐다. 은재는 건배만하고 내려놓았다.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귀를 닫기 위해 먹는데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약한 식욕으론 청각을 이길 수 없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두 어른들이 끊임없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귀로 스며들었다.

철없을 때 연애해서 여태 살고 있어요. 서로 지루할 틈도 없이 말이죠. 시어머니가 아차 싶었던지 말을 돌려 고기가 부드럽다고 했다. 그리곤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우보다 맛있어요. 어떤 말씀을 해도 다 이해해요. 저마다의 인생이 있는 거니까요. 제가 곁에 없었는데 우리 은재가 이렇게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사는 걸 보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네요. 그녀는 와인 잔을 입에 댔다. 은재는 몸을 곧추세운 후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연한 살결 사이로 선홍빛 핏물이 흘러내렸다.

너 같은 애는 아빠랑 살아야 해. 깨진 유리조각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은재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파편은 깊이 박혔고, 시시때때로 통증을 유발했다. 고통이 심한 날은 잘못 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애써 위안했다. 너‘같은 애’가 아니라 너‘는’이었을 거라고.

보면 볼수록 은재가 사돈을 닮았네요, 눈매랑 코가. 시어머니가 덕담이라는 듯 말했다. 어머, 제가 쌍수를 했는데도 닮았다니, 저 같은 거 닮아서 뭐에 쓰겠어요, 아빠를 닮아야지. 안 그러니 은재야? 그녀가 웃으며 몸을 기울여 얼굴을 들이댔다. 은재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했다. 닮았다니, 모멸감을 느꼈다. 와인 잔에 저절로 손이 갔다. 환이 잔을 채갔다. 오늘의 기사님이십니다.

손자보다 손녀가 났겠다며 서로 키워주겠다던 두 어른들은 재롱 보는 재미를 양보하겠다며 난리였다.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교육 환경이 좋은 나라니까 둘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은재는 비명을 질렀다. 우린 애 안 낳을 거예요, 저에겐 엄마라는 존재가 없듯이 엄마라는 호칭도 없어요. 은재는 단호하게 말한 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몹시 놀란 환의 시선이 날아왔다. 아이에 대해서 환과 진지하게 논의한 적은 없었다. 아이를 낳는 건 경제적으로 무리여서 언젠가는 낳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팝의 출입구는 어수선했다.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과 대기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은재는 낯선 사람들이 쏟아놓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정갈한 화단 주변으로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그들 주변으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은재는 몸을 옹송그렸다. 바람이 파고들어 서늘했다. 우주에 홀로 남겨진 듯 쓸쓸함이 밀려왔다.

은재는 희멀건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계단 아래 학교 운동장보다 큰 주차장에 차들이 즐비했다. 팝이 외진 곳에 있어 차 없이 오기 힘든 곳이었다. 으스스 한기가 밀려와 양 팔을 엇갈려 어깨에 올리고 가로등 아래 잠들어 있는 차들 사이로 걸어갔다. 파란 왜건 옆을 지나는데 앞자리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게 보였다. 선팅이 금지되어 있어 차 안에서 키스하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차에서 같은 풍경이 보였다. 은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차와 차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둠 속으로 검은 승용차가 멈춰 있었다. 운전석의 남자가 옆자리 사람에게 얼굴을 들이대더니 겹쳐졌다. 엄마를 기다리던 은재는 가로등 기둥 뒤에 서서 힐끔 힐끔 그 장면을 보았다. 차가 떠나자 엄마가 나타났다. 차 안에 있었던 사람이 엄마였다는 느낌을 간직한 채 엄마의 수다를 들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출근하는 환을 보면서 은재는 심호흡을 했다. 평소 환의 일정에 맞춰 휴무를 정해했다. 되도록이면 같은 날 일하고 같은 날 쉬었다. 이번엔 휴무 조정이 쉽지 않았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환이 쉬는 날을 정하다보니 하루가 어긋났다. 그녀와 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솟았다. 아침은 대충 지나갔으나 점심을 어찌해야 할지 환에게 투덜거렸다. 차 두고 왔어. 거기 베트남 쌀국수 어때? 쇼핑도 하고. 환의 메시지에 은재는 바로 답을 보냈다. 그건 무리야.

쌀국수 집은 베트남사람이 운영했다. 한국 식당은 내키지 않았다. 친근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숙주를 듬뿍 넣었다. 은재는 숙주 대신 고수를 넣었다. 숙주를 좋아하지만 그녀와 같은 행동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고수가 싫다고 하며 국물을 떠먹었다. 맛있네. 베트남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좋네. 호치민보다 하노이가 맛이 더 좋아. 은재는 말없이 쌀국수를 삼켰다.

네가 서울 있으면 같이 여행도 다닐 텐데, 아쉽다. 은재는 거칠게 젓가락을 놓았다. 면이 반이나 남았다. 그녀가 말은 더 많이 했는데 그릇은 비었다.

한국이라면 더욱 어림없어요. 여기니까 그나마 얼굴 보는 줄 아세요. 은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영광이구나. 그녀가 웃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구나.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은재는 가만히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빈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 중에 몇몇은 캐나다인이었고, 대부분 피부가 까무잡잡한 동양인들이었다.

내가 환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했어. 내일 가는데,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 은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웨이브 지는 갈색 머리가 어깨 너머에서 찰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었다. 자신과 무관한 어떤 손님 같았다. 어디든 뱀은 존재해. 숲을 거닐다가 나는 뱀의 매력에 빠졌고, 넌 뱀과 함께 있는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을 뿐이야.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이 하필 네 아빠인 게 문제였지. 네 아빠랑 나는 서로 맞지 않았던 거야. 그런 거야. 너에게 한번은 변명하고 싶었어.

뱀? 겨우 뱀이라고? 은재는 탁자 밑에서 두 손을 꽉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의 핸드폰 속으로 탐험을 떠나는 설렘은 컸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요술방망이었다. 게임에 빠지면 안 된다며 핸드폰을 빼앗으며 엄마는 약속했다. 중학생이 되면 사주겠다고.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505호, 암호 같은 숫자와 연애편지 같은 화려한 문자, 벗은 엄마의 신체 일부와 화사하게 웃은 엄마의 얼굴 등등 다음날이면 사라져 잘못 보았다고 착각해 버렸던 사진들.

그날은 아빠가 엄마보다 먼저 집에 들어왔다. 아빠가 사온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으며 은재는 아빠에게 말했다. 엄마에 대해서. 그러면 친구를 만나러 나간 엄마가 일찍 들어올 것 같았다. 오빠는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가 귀가까지 혼자 있는 지루한 시간도 사라지리라 믿었다

너는 아빠가 불쌍하다고 생각했겠지? 누구나 뱀을 만날 수 있어.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의 차이지.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아빠는 밤이 깊어야 들어왔다. 술 냄새를 풍기는 게 싫었지만 은재는 그래도 아빠를 기다렸다. 불쌍한 우리 딸이라고 안쓰러워하며 안아주는 순간이 좋았다. 그런 날은 오빠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엄마를 내쫓은 얘를 싸고돈다고 아빠에게 대들었다. 그러면 비난의 화살은 오빠에게 날아갔다. 지에미를 닮아서 되바라졌다고, 싹수가 노란 놈이라고. 두 사람의 언성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듯 아슬아슬해지면 은재는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나 좀 데려가. 연락을 하고 싶었으나 엄마의 핸드폰은 바뀌었고 새 번호는 알 수 없었다.

아빠가 재혼하자 오빠는 우등생이 되었다. 세상 모든 과외를 다 하고 싶어 했다. 새엄마와 아빠가 과외비 문제로 자주 다퉜다. 투자에 비해 점수가 낮게 나왔다며 아빠는 속상해 했다. 하지만 오빠는 즐겁게 지방에 있는 대학을 선택했다. 기숙사로 들어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오빠가 한 말을 은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넌 아직도 걔를 새엄마가 데리고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유전자 검사는 해보나 마나다. 너도 공부하고 싶으면 원 없이 해. 양다리가 남녀사이에서만 있는 건 아니야. 엄마 연락처 가르쳐 줄까?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깨달았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엄마가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은 자신이 뱀처럼 아빠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라고.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은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선물을 사가야 하는데, 쇼핑 몰 좀 데려다 줄래? 그녀가 그만 일어서자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여기 건 거의 중국산이니까 그냥 가세요. 은재는 테이블 위에 팁을 올려놓고 계산대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은재는 주택가를 지났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집들은 담 대신 측백나무처럼 생긴 아트로비렌스를 촘촘히 심어져 있다. 가지런히 전지한 나무 위로 2층 창문이 보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커튼이 휘날렸다. 그림 같은 집에서 사는 유일한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가를 지나면 공원이 나올 터였다. 햇살이 퍼질 때 눈여겨 봐두면 어둠이 장막처럼 그것들을 가린다 해도 두려울 게 무엇이랴. 은재는 밤길을 걷는 연습이라 여기며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집 앞 화단에 작약이 활짝 피었다. 겹쳐진 붉은 꽃잎 속에 노란 수술이 작은 꽃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에서 본 꽃이라 반가웠다.

핸드폰이 울렸다. 은재는 에코 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환이었다. 사무실 도착했다며 출근하는 길이냐고 물어 은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사무실로 가는 중이라고 통화한 지 한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인천 공항 행 비행기는 벤쿠버 공항에서 아침 9시 20분에 출발이었다. 고맙게도 환은 공항에 같이 가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를 배웅하고 와도 출근 시간이 넉넉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어머니가 다음엔 퀘벡이랑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싶은데 당신의 허락해 줄지 걱정이라고 하셨어. 환의 말에 은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내 것은 아니지만 안 된다고 전해줘. 은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토론토는 여기서도 비행기 타고 몇 시간가야 해서 다른 나라 같다고 말씀드렸어. 그렇지만 이번엔 제가 마중 나가겠다고 했더니 막 웃으시더라. 은재 몰래 나오라고 하시며. 이어 환이 호탕하게 웃었다.

비가 올 것 같아. 은재는 멀리 하늘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환이 뜬금없이 먼저 어른들이 말씀 중이라 끼어들기 뭣해 말하지 못했다며 여기는 뱀 없다고 했다. 숲은 주로 산딸기덩굴이고, 온기가 없어 춥지 않겠냐고 물었다. 은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따 늦지 않게 데리러 오라고 했다.

비가 가늘게 내렸다. 키 큰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고 지나갔다. 남자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었다. 우산이 없는데도 빨리 걷거나 뛰지 않았다. 은재는 비가 오거나 말거나 일정한 속도로 걷는 사람들 틈에서 비를 피하겠다고 달리곤 했다. 여기는 계절에 상관없이 비가 잦은 편인데도 우산 쓴 사람들을 보기 힘들었다. 왠지 그들은 젖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언젠가 그들의 옷차림, 일테면 옷의 재질이 우리와 다른 거 아니냐고 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오우, 대단한 발견! 캐나다인만 입는, 비에 젖지 않는 비법의 옷을 한 벌 사줄게요. 환은 몹시 짓궂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멀리 비에 젖어가는 숲이 보였다. 은재는 비에 익숙한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었다. 마치 비법의 옷을 입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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