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미워하며 닮는다고 했던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행태는 묘하게 북한을 닮아있다. 그중 하나가 벼랑 끝 전술인데, 이 사람들은 굳이 그래야 하나 싶은 작은 입장 차이에도 항상 막다른 자리로 가 버리곤 한다. 바로 하루 전까지 화해의 기미가 없던 윤석열, 이준석, 김종인 세 사람이 갑자기 갈등을 봉합했다. 보수 언론은 이를 ‘삼위일체’로 부르는 신성모독까지 무릅쓰며 칭찬했지만, 이런 행태가 전략이고 리더십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핵폭탄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북한의 몽니도 훌륭하다 해야 할 판이다.

벼랑 끝 전술은 상대방에게 자기 요구를 받거나 파국에 이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정상적인 협상과 거리가 멀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선의나 신뢰가 있으면 쓰지 않는 방법이고, 적대국 사이에서나 통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도 흔히 쓰이고 급기야는 같은 당 안에서 그러고 있다.

정상적인 협상이 아니다 보니 소위 ‘윈윈’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약간이라도 불리한 쪽이 마지못해 뜻을 접어야 상황이 끝나니까 승자는 하나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른바 ‘전권’은 얻었고, 이준석 대표도 일종의 항복을 받아냈다. 윤석렬 후보는 급한 불을 끈 셈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타일을 구겼다. 폭탄주와 어색한 만세, 언론의 아첨이 필요했던 이유다.

벼랑 끝 갈등의 극적인 봉합은 늘 밀실에서 일어난다. 벼랑 끝은 민주적 토론과 합의의 장소가 아니고 갈등의 대표인 대장의 고독한 결단만 남는다. 북한이 늘 벼랑 끝 전술을 쓰는 이유는 독재 정권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은 같은 편 안에서도 시끄럽고 지난해서 단칼에 해결되는 일이 없다. 그러니 리더의 결단과 권한에 무게를 두는 김종인 전 위원장의 ‘전권’은 민주주의보다는 그가 늘 구사하는 벼랑 끝 전술과 더 잘 어울린다.

벼랑 끝 전술은 상대편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같은 편에게도 부담스럽다. 누군가 벼랑 끝에 서면 같이 서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자가 돼 버린다.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서 적군과 아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협상할 수 있었던 일도 극단의 대립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복잡한 세상사를 두 가지 선택지로 나누어 처리하니 만족스런 결정이 나올 리 없다. 벼랑 끝에서 이겨도 덮어 두었던 이견이 돌출하면 종국에는 자중지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벼랑 끝에 서면 순간 멋있어 보이지만 다음 순간 초라해진다. 당사자도 보는 사람도 괜히 부끄럽고 무안해진다. 외교 행사도 아닌데 같은 당 사람끼리 ‘합의문’을 낸 윤석렬 후보와 이준석 대표도 그렇지만, 바로 하루 전날 마음이 떠난 것처럼 말하다가 덥석 총괄선대위원장 자리를 잡은 김종인 전 위원장의 행보는 참 보기 민망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지 않고, 바꾸게 되면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그런 사람을 보면 멸시한다.

툭하면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게 습관이 되는 것도 문제다. 북한도 그렇고 김종인 전 위원장도 그렇고, 앞으로 이준석 대표도 그리될 것 같다. 문제는 이 나쁜 습관이 정치인들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퍼져간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이슈에 대해 벼랑 끝에서나 나올만한 극단적인 표현과 행동이 난무하고, 정상적인 협상 대신 흑백논리와 벼랑 끝 전술에 의존하여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시도가 너무 잦다. 보는 것도 부끄러운 이런 일을 그러려니 넘어가면서 우리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지만, 정치인들의 자칭 ‘책략’과 언론의 리더십 타령을 보니 개선은 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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