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 재상 상앙(商앙)은 엄격한 법치주의로 형법, 토지법, 가족법 등, 대개혁으로 제국을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결국 반대파인 유가(儒家)로부터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상앙은 자기가 만든 법령에 의거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 진 것이다. 뒤떨어졌던 진나라를 일거에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인물이 상앙(商앙)이다. 중국 역사에서 상앙의 변법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만이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 역사상 개혁자들은 개혁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중시하면서 변법(變法)이라 했다.

개혁이란 합법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 개혁을 순리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신뢰를 획득하면서 보수 세력과 투쟁해야 한다. 상앙은 “시대에 맞춰 법을 만들고 상황에 따라 예의를 제정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기성 귀족 세력이 주장한 “옛것을 추종하고, 예의를 준수하는” 논리를 철저히 반박했다.

그는 두 차례의 대규모 변법을 주도하였고, 군현제도 추진, 군공(軍功)의 장려, 생산 발전 등의 개혁 조치를 추진하여 경제발전을 이루고, 진시황의 천하 통일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는 냉혹하리만큼 엄격한 법가사상으로 진나라의 개혁을 이루어 부국으로 도약시켰다.

상앙은 재상으로 중용되었고, 상앙이 추진한 ‘20급작 제도’는 진나라 군사 체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진나라를 급속하게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주나라 이후 유지되어 온 봉건적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체제가 해체되고 오직 전쟁에서의 공적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고, 고도의 군사화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군공(軍功)과 농업 수확물에 의하여 작위를 주는 군작 제도로의 개혁은 귀족 제도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평민들에게 군사적 공헌과 농업 및 양잠업 그리고 방직업의 수확물에 따른 신분 상승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력의 향상과 아울러 백성들의 에너지도 집결시킬 수 있었다. 또한 부세(賦稅) 제도를 정비하고 인두세를 징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충실화하였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시행함으로써 중앙집권과 행정제도 정비를 도모하였다.

상앙의 변법은 일종의 명령형 계획경제였고 동시에 전민(全民) 군사동원형 체제였다. 이러한 상앙 변법의 시행을 통하여 진나라는 천하 통일로 가는 결정적인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룡유회(亢龍有悔), 솟아오른 용은 후회하는 법이다. 상앙을 중용했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상앙에게 형벌을 받고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이 일제히 나서서 상앙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마침내 상앙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상앙은 급히 도망쳐 함곡관에 이르러 여관에 묵으려 했다. 여관 주인은 상군(상앙)의 법은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재워주는 것을 벌할 것이라고 하면서 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상앙(상군)은 크게 탄식하였다. “법령을 제정한 폐단이 이 정도까지 오다니!” 상앙은 밤길을 재촉하여 위나라로 도망쳤으나 추방당하고, 정(鄭) 나라에 가려다가 진(秦)나라 군인에게 살해되어 시체마저 거열형으로 찢어졌다. 가족들까지 처형되었다.

자신의 발의로 공들여 만든 법에 따라 자신이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엄격한 변법으로 개혁을 주창한 법가들을 생각하게 된다. 법 만능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법치(法治)보다는 덕치(德治)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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