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거제 이수도를 찾았다. 근년에 많이 알려진 곳이다. 남해 풍광도 보고 거제 변두리 섬의 문화적 답사도 하고 싶었다. 거가대교, 장목면, 해안일주도로를 타다 옥포대첩로에서 우회전하면 복항마을. 언덕 하나 넘으면 시방마을이다. 시방리 해안 동쪽으로 바다 건너에 이수도가 있다. 원래 이름이 물섬, 학섬이었는데 대구 어종의 산란해역이 되고 멸치잡이 권형망이 들어와 생활이 넉넉해지자 이수도(利水島)로 바뀌었다고 한다. 풍어로 부유해진 것은 이해가 되지만 바닷물이 이로워 붙여진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섬에 먹을 물이 풍부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마을의 형상 때문에 시방마을과 이수도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생겼다. “시방마을은 화살 모양, 이수도는 학이 알을 품은 형국. 어느 날 한 도인이 나타나 시방의 화살이 겨누어져 이수도가 복을 받지 못하니 ‘방시순석(防矢盾石)’ 비를 세우라고 일러주고 떠났다. 도인의 말대로 비석을 세웠더니 이수도는 살기 좋아졌고, 시방마을은 흉어로 어려워졌다. 시방마을에서 대책으로 ‘방시만노석(放矢萬弩石)’의 비를 세우고, 이수도는 ‘방시만노순석’을 세우는 분쟁이 계속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비석이 지금도 우뚝 남아있다.

오랜 기간 두 마을은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비방하며 내왕을 막기도 하고, 식수 공급도 방해하는 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왜 상생하는 방법은 찾지 않았을까? 시대와 지역이 달라도 인간 세태가 크게 다르지 않음이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이간질하는 도인이 있기 마련이다.

현 정국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 상대방을 저격해야 우리가 산다는 심보다. 저쪽이 넘어지면 우리가 살고, 일어서면 우리가 탈 난다. 저격수로 당당하게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개탄스럽다.

지금은 서로 화합하고 협조하여 관광객 유치와 어업 활성화로 두 마을이 다 살기가 좋아졌다고 한다. 상생의 길을 찾은 것이다. 상생이 아름다움이다.

시방마을에서 도선으로 이수도. 이수도에서 시방마을. 둘레길을 걸었다. 해안 풍광이 아름다웠다. 오고 가는 길에서 ‘팔랑개어장놀이’와 ‘살방깨발소리’라는 홍보 안내판을 보았다. ‘팔랑개어장놀이’는 남정네들이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으로 죽고 돌아오지 않자 그 일을 대신한 아낙들이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며 풍어제를 올리는 놀이라고 한다. ‘팔랑개’는 파도가 변덕스럽게 이는 바다를 말하는 것 같다. ‘살방깨발소리’는 굴, 전복, 조개, 고등, 파래,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며 “굴 까러 가세, 굴 까러 가세”하고 부른 노래라고 한다. 살방은 시방(矢方)이란 마을이고, ‘깨발’은 깨끼발인 것 같다. 즉 살방(화살마을)을 중심으로 한발을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 것이다. 변덕스러운 파도를 잠재우고 풍어를 비는 마음을 담은 놀이다. 지방 문화재로 자리매김 되어 대회에도 출전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지낸 분의 생가 표지판도 보였다. 민주화 선봉, 금융실명제 실시,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재판,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철거 등의 치적을 남긴 분이긴 하지만 찾고 싶지 않았다.

멸치 한두 마리는 대수롭지 않아도 떼거리가 되면 칼슘이 되고, 육수의 맛을 내는 재료가 되고, 반찬이 되어 엄청난 부(富)를 가져다준다. 대구가 무더기로 산란하고, 멸치가 떼거리로 잡히고, 관광객이 몰려오는 섬이다. ‘팔랑개어장놀이’와 ‘살방깨발소리’ 같은 민속놀이를 지닌 시방마을과 이수도에서 두 마을이 함께 잘사는 상생의 교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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