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칼럼니스트
이상철 칼럼니스트

역사적으로 소는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신성의 대상이자 탐식의 대상인 귀한 동물이었다. 특히 농업이 근본인 시대의 소 보유량은 빈부 구분의 척도로 여길 정도로 소가 귀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유별했다.

“귀신에게 제사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는 세종실록 기록과 조선 영조 때에 명절에 도축한 소만 2만~3만 마리에 이른다는 기록은 농본국가에서 소의 위상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조선 후기(17세기)의 인구가 약 1,500만 명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1,000여 마리씩 도살해 나라에서 수시로 우금령(牛禁令)을 내렸다는 기록은 소고기를 향한 탐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소 도축을 유일하게 허가한 장소가 ‘성균관’이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소고기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고, 판매된 소고기가 성균관 유생들의 뒷바라지 경비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소를 팔아 자녀 대학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한 대한민국 건국 세대들을 생각나게 한다. ‘우골탑’(牛骨塔:고액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부모가 내다 판 소 뼈다귀로 세운 대학)이라는 단어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역사가 입증하는 셈이다.

과거, ‘우시장’들이 많았던 곳은 자연스럽게 도축장이 있었고 소고기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던 것 같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 말기부터 대규모 우시장이 있었고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 해에 수 만두의 소가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한우 생고기인 ‘뭉티기’이다. ‘뭉티기’는 생고기를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뭉텅하게 썰어 아무런 조미(調味)없이 양념장에 찍어 먹는데 대구 한우의 품질이 상당히 우수했다는 점을 증명한다.

지금도 ‘뭉티기’는 대구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쓰디쓴 소주의 안주가 되고, 기쁨을 나눌 때는 소맥 폭탄주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된다. 뭉티기 한 점을 양념장에 푹 찍어 먹으면 쫀득쫀득한 육질이 고스란히 전해져 식감은 오랫동안 입안을 맴도는데 이것을 잊을 수가 없어 ‘뭉티기’를 계속 먹는다는 마니아들이 많다.

오래도록 씹어도 차진 생고기의 질감은 오로지 신선한 ‘뭉티기’에만 느낄 수 있다. 정치인들도 ‘뭉티기’처럼 신선했으면 좋겠다. 기득권에 집착한 채, 구태를 답습하고, 실력도 없이 행사에서 폼만 잡으려고 하는 정치인들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신선한 뭉티기를 담은 접시는 뒤집혀도 흘러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인도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겠다는 마음이 정치 지형이 뒤집혀도 흘러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뭉티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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