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청소년단체 YMCA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참 많은 위기 청소년들과 만날 수 있었다. 가출청소년 쉼터로부터 위기청소년 상담실 등 국가가 운영하는 청소년기관의 책임자를 맡아 보기도 했고 이런 경험들을 인정받아 훈장도 받았다. 위기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실상 나에게 정말 귀중한 경험이 되었고 이런 경험은 두 아들의 교육과 양육에도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로 가득 차 있었던 치기 어린 실무자는 우리 아이들과 만나면서 ‘경청’과 그들의 욕망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인정’의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중년의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위기 청소년 활동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도발적으로 “자식들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예상대로 약 30여명의 참여자들 중에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그럼 왜 아이들과의 대화가 중단되고 침묵의 관계가 되었을까? 대부분의 경우 자식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공부하라고 몰아붙이는 부모의 강박적 강요에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으면서 대화는 단절된다. 침묵의 관계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불안의 언어가 쏟아지면서 시작된다. 사랑의 조언 뒤에는 자식에 대한 불신이 숨어있고 아이들은 이것을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자신이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 반명 경청과 인정은 아이들의 미래를 향한 오디세이에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 되며 거친 항행의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

민감한 청소년기를 학업성적에 의해 인생의 모든 것이 결판나는 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아이들의 미래 설계에 부모들이 난입하여 부모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인가? 아이들이 왕따로부터 학교 폭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아픔을 호소할 바로 그 한 사람이 없어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보고는 자살한 청소년들 심리 해부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 된다. 사실상 살고 싶어 수없이 많은 도움의 신호를 보내지만 이런 신호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실제로 자살을 감행한다. 마땅히 부모는 자식의 긴급구조 신호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자식의 미래로 꽉 차있는 부모는 실상 자식의 가장 절박한 신호는 감지조차 못한다. 자식은 단지 나의 결핍이 투사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통해 얼마나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을까? 부모와 친구가 그 대화의 가장 중요한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의 주장과 논리가 허술하다 할지라도, 상상력이 성숙하게 영글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큰 격려는 경청이다. 어떤 이야기도 우호적이고 사랑 어린 눈빛으로 경청할 때 아이의 내면에 자신감과 방향타가 생겨난다. 아이들이 유치하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때 부모로서 당혹스럽지만 이런 경우 나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꿈꾸며 말하는 아이를 이를 악물고 인정한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이의 꿈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진정한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세대이기 때문에 실패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은 실패를 통해 배우지 않는가? 조그만 실수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한국의 내신제도를 비롯한 입시제도는 그래서 끔찍하다. 윤석열 정부의 주요 보직의 80% 이상이 서울대 출신과 검사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실패할 자유와 경험이 억압되고 보류된 주체들이 대한민국호를 운행하는 비율이 너무 높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인정받지 못해 온몸에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물론 성인인 나도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결핍된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결핍된 존재가 인정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은 나에게 없는 것을 사랑의 대상에게 주는 것이라 한 것일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위기 청소년들과의 만남의 현장에서, 그리고 두 아들의 양육과정에서 경청과 인정이 기성세대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기성세대가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말 중에 하나가 ‘꼰대’라면 우리 아이들이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로 ‘라떼는’이라는 말이 있다. 꼰대와 ‘라떼는’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언어로 가득 찬 기성세대의 언어과잉을 희화화한 표현이다. 이제는 낡고 고답적인 낡은 언어는 줄이고 시대의 문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바로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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