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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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드리고 싶다.

[감상] 십수 년 만에 오대산 월정사를 찾았다. 팔각구층석탑은 아쉽게도 보수 중이었다. 전나무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묵은 숨을 토해내고 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피정(避靜)이란 조용한 곳으로 물러난다는 뜻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적 수련을 가리키는 용어다. 시인도 영하 20도의 혹한에 전나무숲길을 걸으며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를 세웠다. 겨울, “오대산의 고요”와 전나무숲길의 걷기 명상은 온몸으로 경배드릴 만하다.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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