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 논설주간
이동욱 논설주간

“‘풍기(豊基)의 유학 도시복(都始復)은 성실함과 효성이 평소 드러났으니 마땅히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소서’라고 암행어사 이도재가 건의했다. 건의에 따라 왕이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20권, 고종 20(1883년)년 9월 23일 자에 나오는 기사다. 효자 도시복(1817~1891년)은 철종 때 태어난 사람으로 효성이 지극해서 고종이 효자로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했다.

실록에는 풍기 사람으로 나와 있지만, 지금의 경북 예천군 상리면(2016년 효자면으로 개칭) 사람이다. 도시복은 숯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형편이었다. 도시복의 효행은 명심보감에 4가지 설화로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 대표 효자다. 명심보감에는 ‘솔개가 날라준 고기’ 이야기를 비롯해 ‘한여름 호랑이를 타고 얻어온 홍시’, ‘한겨울에 얻은 수박’,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등 네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근 발간한 ‘문경문화 127호’는 예천군 효자면 용두리 산골에서 숯을 구우며 살던 도시복이 문경시 동로면 석항리로 이주해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실을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다락골에서 발견된 도시복의 묘비를 통해 알 수 있다.

도시복의 효행과 관련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줄로 언급돼 있지만 문경시 동로면 지역에는 도시복이 석항리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발견된 도시복 묘의 상석에는 부인이 곡산 연씨로 묘가 ‘동로 저수령’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서 도시복의 효행뿐 아니라 삶의 단편들이 드러나고 있다. 문경시가 예천군과 함께 효자 도시복 관련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구축하겠다고 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한국의 효사상을 “인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 했다. 이 시대 우리는 효를 너무 고리타분한 설화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이동욱 논설주간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