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나교 수피아미술관 기획실장

미술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조각작품이다. 최초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시가 장식미술 박물관 건립계획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로댕에게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입구 제작을 의뢰해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시의 사정으로 박물관 건립이 백지화되면서 의뢰가 취소되어 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오히려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라고 만족해했다고 할 만큼 이 작품에 대한 로댕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구상부터 제작까지 30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면서 석고 형상까지는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청동 주조물로 완성된 조각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로댕은 회화가 성행하던 시기에, 신화나 종교, 영웅을 주제로 삼고 이상적인 비례와 형상을 고집하던 전통적인 조각 미술 풍습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표현하고자 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독립된 조각이 아니라 지옥문의 상단부에 있는 여러 조각물 중 하나로, 조각상은 온몸에 잔뜩 긴장된 근육의 표현과 내적 고뇌를 담은 모습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조각상의 발아래 펼쳐진 광경은 욕망과 쾌락, 절망과 고통이 점철된 수많은 영혼의 모습이 극적으로 목격된다.

로댕은 왜 벗은 모습의 인간 형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제작했을까?

인간이 진솔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점은 어쩌면 무사(無私), 무욕(無慾)인 상태가 아닐까 싶다. 나란 존재에게 덧씌워진 무수한 사회적 치레를 하나둘씩 벗은 상태에서 진정한 자아와의 소통은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906년, 청동. /로댕 미술관

용이 해진다. 로댕 역시 태초의 인간 모습으로 제작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에 내재한 격렬한 감정 덩어리와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을 가식 없이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그는 흙을 빚으며 생각을 통해 인식하기보다는 감각이 인식의 바탕으로 작용하여 느끼고 울림이 있는 현존재를 생생하게 끄집어내려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 글귀도 있듯이, 끝없이 전개되는 고민, 생각,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로댕이 흙의 질감과 인간의 감각만을 통해 느끼며 따뜻한 기운을 전달해 불후의 걸작을 후세대에 남겼듯이. 오늘 하루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오로지 범세계적인 감각만을 장착한 채 주위의 모든 자연과 인간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삶이 녹록한 적이 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기 보다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할 수 있다면 현대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 가치와 행복을 증명해 가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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