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균 영남대학교 객원교수·전대구경북연구원장
오창균 영남대학교 객원교수·전대구경북연구원장

한 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쉴 틈 없이 일하느라 지친 직장인들에게 훌훌 털고 여행 가서 마음껏 카드를 긁도록 부추기는 속삭임이었다. 신용카드사가 만든 단문 카피는 히트를 쳤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 추억의 속삭임은 중장년 세대를 위한 응원가의 일부가 되었다. 인생 전반기를 앞만 보고 달렸으니 은퇴 후에는 여유롭고 보람된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서다.

인생의 적정 단계가 되면 누구나 은퇴한다. 직장인이든 기업인이든 정치인이든 다 똑같다. 새로운 각오로 인생 2막을 시작한다. 그 시기를 잘 보내는 건 중장년의 주요 관심사다. 모두가 모범적인 은퇴 생활에 대한 각오를 다진다. 그러고는 한적한 곳을 찾아 목가적인 일상을 즐기고, 왕성하게 활동영역을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고자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권력자들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은 소문난 복지국가다. 세계인들이 꼭 한번 살아보고 싶어 하는 나라다. 그런 스웨덴을 건설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타게 엘란데르 총리다. 무려 스물세 해 동안이나 재상을 역임했던 정치인이다. 아주 일을 잘해서 국민들이 역대 최장기간의 장기 집권을 허용한 것이다. 엘란데르는 마지막 재임기간에 치른 선거에서 스웨덴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아름답게 은퇴했다. 총리 시절에 엘란데르의 별명은 단벌신사였다. 낡은 구두를 밑창 갈아가며 신고 다닐 만큼 검소하게 살았다. 특권을 버린 채 친구처럼 이웃처럼 국민과 함께했다. 은퇴하고서는 살 집이 없어서 지지자들이 돈을 모아 주택을 마련해줬을 정도였다. 야인이 된 엘란데르의 집은 늘 방문객으로 북적였는데, 지지자보다는 평소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재임 시절의 자국민 평가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박했다. 그는 퇴임 후에야 ‘자연인 카터’로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벗었다. 카터는 잊혀진 삶을 선택하지 않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인권 개선과 기아 퇴치를 외쳤다. 자기 집을 짓기보다 세계 곳곳을 찾아서 남의 집을 지어주는 헌신의 삶을 살았다. 우리에겐 미군 철수 문제 등으로 얽힌 대통령이어서 인상이 별로였지만 평범한 시민이던 때에 북한을 방문해 평화와 인권을 설파하기도 하면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런 ‘자연인 카터’는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우리 전직 대통령들의 은퇴 생활은 어떨까. “잊혀진 삶을 살고 싶다”던 한 분은 전원에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고 책방을 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기대가 퇴색하고 있다. 골목은 지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말과 행동이 다른 듯하다는 비판 여론이 만만찮다. 현 정부의 국정 운영에 의견을 내고 여러 차례 오해받을 만한 처신을 하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저를 두고서는 상왕의 아지트라고도 한다. 최근 수년에 걸쳐 대한민국 뉴스판을 점령한 전직 장관의 행보는 훨씬 더 흥미롭다. 차가운 국민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론을 역행해서 달린다. 그 자세가 태연하고 당당하다. 요즘의 움직임을 봐서는 아예 당장이라도 정치를 재개할 태세다. 그래서인지 총선 출마를 점치는 진단이 다수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전임 대통령 중에는 추징금 꼴불견과 세 과시로 일관했던 분도 있었다. 엘란데르나 카터와 비교된다.

은퇴 후 삶은 당사자 고유의 선택 영역이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 등 사회지도층의 경우는 본인 의사를 떠나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은퇴는 아름다워야 한다. 향기로울수록 좋다.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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