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밥먹고가 표지
△‘언니, 밥 먹고 가’(에리카팕 대화집, 세미콜론)

생초면인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요리연구가’까지는 어렵더라도 ‘요리먹구가’ 정도는 될 수 있겠다는 발상으로 직접 독특한 직함을 창조해 ‘요리’와 ‘개더링(gathering)’ 관련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에리카팕.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며 7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이 책의 저자 박지윤이다.

예명마저도 심상치 않은 그는 조금 더 있어 보이고 맛있게 차려 먹을 수 있는 콘셉트의 소셜 다이닝 프로젝트 ‘잇어빌리티(EatAbility)’를 진행하고 독립출판 등을 병행하면서 회사생활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속에 2021년 전격 퇴사를 감행하고, ‘에리카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애니메이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리를 재현해보는 독특한 쿠킹 클래스를 비롯, 하는 일마다 ‘흥’과 ‘끼’를 발산하며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그. 삶의 터전인 작은 복층 원룸도 이탈리아어로 ‘에리카의 집’이라는 뜻인 ‘카사데리카’로 이름 붙이고, 무채색 회사원이 아닌 알록달록한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이곳에서 진행된 ‘함바데리카’ 프로젝트는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해가는 여성 노동자에게 식사를 차려준다는, 이른바 건설 현장 ‘함바집’ 콘셉트의 인터뷰 프로그램이다. KBS 일반인 관찰 예능 프로그램 <요즘것들이 수상해>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데, 인스타그램 모집 공고를 통해 신청한 41명과 방송 출연 당시 섭외한 2명, 그리고 이 책을 위해 초대된 스페셜 인터뷰이 2명까지 총 45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함바데리카를 찾아와 이곳의 시그니처인 독특한 콘셉트의 안경 등을 함께 쓰고 어색함을 풀며 식사를 하고 일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에리카팕이 준비한 식사 메뉴는 된장찌개, 골드키위제육볶음, 들기름묵은지무침, 애호박채전과 같은 흡사 이모가 차려주는 푸근한 한식 한상차림이다. 손잡이가 달린 투박한 양은잔에 막걸리를 담아 내거나 어릴 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델몬트 쥬스병에 담긴 보리차 등 콘셉트부터 개성이 넘친다. 이 차림에 사용한 그릇들은 동묘 구제시장에서 직접 함바데리카에 어울릴 것으로 골라온 빈티지 제품들이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서 유아동 콘텐츠 기획자, 뮤직 큐레이터, 공연 티켓 매니저, 출판사 마케터, 노무사, 논술·면접 강사, 식품 MD, 역사학원 원장, 일러언니 밥 먹고 가 4스트레이터, 안무가 등등 다양한 직군의 여성 노동자 11명과의 대화를 다듬어 이 책에 수록했다. 직업은 물론이고 회사원, 자영업자, 프리랜서 등 고용의 형태도 각기 달랐다. 여기에 ‘브런치’ 브랜드 마케터 김키미, 당시 ‘TBWA’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민철까지 참여해 한층 더욱 더 깊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책은 함바데리카를 찾아온 이들의 단정하게 잘 지어진 성공담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일이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바뀌지만 결국 일에서 성과를 내고 보람을 얻는 것이 기쁨인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지만 반짝이는 인사이트가 가득하다. 때로는 힘에 부쳐 매일매일이 ‘존버’일지라도,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을 맞닥뜨리며 헤쳐온 사람들의 고군분투에 대한 기록이다. 일의 영역에는 업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 휴식, 삶을 관통하는 철학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업력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 불안과 분노를 조절하며 현장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그대로 보여준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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