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임금 섬길 수 없다"…고려에 대한 충의와 지절의 정신 지켜내

안동시 안기동에 있는 김자수 정효비각.

△이방원의 삼고초려

태종 이방원의 부름은 엄중하고 집요했다. 정신 차릴 틈 없이 불러댔는데 호출의 이면에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1351 ~1413)는 그때 고향 안동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자신이 형조판서에 제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침묵했다. ‘을’의 침묵에 ‘갑’은 조바심을 냈다. 두 번째 전갈에 이어 곧바로 세 번째 사람이 왔을 때 김자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겠구나, 긴 숨을 내쉬었다.

김자수와 이방원은 가는 길이 달랐다. 고려의 개혁에는 뜻을 함께했으나 김자수는 고려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나라를 개조하는 온건개혁파로, 이방원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강경개혁파로 갈렸다. 위화도회군 후 고려의 실질적 주인은 이성계 일파였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 아래 우왕과 창왕을 폐위했고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피살했다. 그즈음 김자수는 충청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두문72현의 한사람으로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고향 안동에 내려왔다. 안동의 남문 밖 상촌(桑村)에 은거하며 호를 ‘상촌’이라 지었다. 안동에서 시와 술로 시름을 달래며 산 지 10년 가까운 세월, 잊혀졌던 그를 왕이 된 이방원이 불렀던 것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문과 급제자다. 한때는 이방원과 권근(權近), 김자수가 좋은 벗이었던 적도 있었다. 이방원은 왕이 되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고려 중신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용책을 펼쳤다. 정몽주 길재 김약항 등을 절의지사로 포상 추증하고 김자수를 3차례나 불렀다. 왕은 마지막에 엄중한 경고를 함께 담아 사람을 보냈다. “이번에도 기꺼이 오지 않겠다면 반드시 너의 처자식을 죽이고야 말겠다.”

김자수는 고민이 깊었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권근은 100세 된 노모를 죽음에 몰아넣을 수 없다며 절의를 굽혀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일이 이방원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도대체 너는 뭐냐.’ 이방원의 ‘삼고초려’는 김자수에게 그걸 묻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김자수 순절비각.

△왕의 부당한 지시에 반발, 유배길에 오르다

김자수의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이다. 조부는 삼사부사 김영백, 아버지는 통례문부사 김오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다. 신현의 문인으로 19세에 생원시에서 장원했다. 성균관에 입학해 24세에 지공거 이무방과 동지공거 염흥방이 주관하는 친시문과에서 장원해 덕령부주부에 임명됐다. 덕령부주부는 정6품으로 보통 과거급제자가 종9품에서 관직을 시작하는 것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그는 생원시와 문과에 잇따라 장원급제하며 고려왕조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식인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고려 말 둔촌(遁村) 이집(李集), 양촌(陽村) 권근(權近), 방촌(厖村) 황희(黃喜)와 함께 ‘사촌(四寸)’으로 불렸다. 이색·정몽주·이숭인을 일컫는 ‘삼은(三隱)’과 함께 일세의 충신 명류 석학으로 꼽히는, 고려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김자수는 성리학적 이상으로 무장한 단단한 간관이었다. 그의 논리 앞에 성역이 없었다. 잘못된 일이 있다면 설사 그가 왕일지라도 서슴지 않고 직언을 쏟아냈다.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가 밀성에서 왜적을 격파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이 의복과 술을 내려 주자 조민수가 표전을 올려 사례했다. 왕이 김자수에게 회답하는 교지를 짓도록 명하자 거절했다. “조민수는 온 도내의 병사를 거느리고 김해·대구 전투에서 져 많은 군사를 죽였습니다. 밀성전투에서 이긴 조그마한 공을 가지고 그의 죄를 모두 가리지 못하니 의복과 술과 말 등으로 포상하는 것은 지나치십니다. 또 어찌 회답하는 교지를 내리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이 그를 전라도 돌산으로 유배 보냈다.

그가 정언일 때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안동으로 돌아와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시묘를 사는 동안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매일 조석으로 두 차례 죽을 먹었을 뿐 입에 밥을 넣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김자수의 극진한 효행이 알려지자 당시 왕이 정려를 내려주고 당대의 이름난 화공 용면(龍眠)에게 시켜 그가 시묘하던 모습을 그리게 해 ‘삼강행실록’에 실었다. 조선에 와서도 그의 효행은 국가적 모범사례로 꼽혔다. 광해군 때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김자수의 여묘살이 그림과 함께 요약된 글이 실렸다.

김자수는 고려에 성리학이 도입된 뒤 성리학적 이상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애썼다. 개혁적 시무론으로 무장한 그는 왕이 불편해하는 상소와 탄핵을 줄기차게 올리며 왕과 귀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공양왕이 생모인 국대비에 대해 극진한 효를 행하는 반면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홀대하자 법도에 어긋난 비례라며 왕대비를 존숭해 왕실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인륜의 대의를 밝히라고 간언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공민왕 2년, 연복사의 중 법예가 절 경내의 5층탑과 연못 3곳, 우물 9곳이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있다며 수리해 줄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왕은 이 절의 복원공사를 즉각 시행하면서 궁실 별전에 인왕불을 봉안하고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는가 하면 연복사 낙산사 온륜사 등에 내시를 보내 재를 올리고 복을 빌게 했다. 또 매월 두 차례씩 승려를 입궁케 해 불경을 독경시키고 각종 불교 행사를 벌였다. 왕은 연복사탑을 확장 수리한다며 민가 3, 40여 호를 밀어내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김자수는 연복사탑 공사를 중지할 것을 호소하면서 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자수의 누운 비.김자수가 절명할 때 내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자 누운 비를 제작했다.

△나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

정몽주가 이방원의 자객에게 피살당했다. 당시 정국은 이성계, 정도전, 하윤, 조준 등 고려왕조를 엎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꾸는 급진역성혁명파와 이색, 정몽주, 길재, 김진양, 김자수를 중심으로 뭉친 온건개혁파가 정면으로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정몽주의 피살로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뒤 7월에 급진역성혁명파들이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을 개국했다.

이때 김자수는 조선건국을 반대하는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에 김자수가 들어있다. 두문동에 들어갔던 김자수는 뒤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김자수의 절명시를 새긴 ‘상촌시비’ 경기도 광주에 있다.

시대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은일의 삶을 살면서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는 그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닥쳤다. 태조 이성계가 대사헌으로 불러낸 데 이어 태종 이방원이 그를 형조판서에 제수하며 3번이나 불렀던 것이다. 3번째 부름에는 태종의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자수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사태를 매듭지으려 했다. 외아들 근(根)에게 관을 짊어지게 하고 길을 나섰다. 안동을 떠나 경기도 용인의 능곡에 이르렀다. 그곳에 이방원의 손에 죽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었다. 술을 올리고 절한 뒤 크게 통곡했다. 추령(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태재)에 이르러 아들 근에게 말했다. “여기가 곧 내가 죽을 자리다. 비록 여자라도 두 남편을 거치지 않는데 하물며 남의 신하가 돼 두 성씨의 임금을 섬기겠는가. 내 뜻이 이미 결정됐으니 너는 당장 나를 추령 곁에 묻고 삼가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놔둬라.” 그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평생 동안 충효에 힘쓴 뜻을

오늘 누가 알아주리오

한 번 죽음 서운치 않으니

구원에서 응당 알아주리라

平生忠孝意 今日有誰知

一死吾休閑 九原應有知
 

김자수를 제향하는 충북 음성 지천서원.

△김자수 유적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태재는 광주 신현리에서 분당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예부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1413년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서울로 향하던 김자수가 이곳에서 순절했다. 순절 당시 이곳은 ‘추령’으로 불렸다. 김자수의 신도비와 사당을 세웠으나 도로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신현리로 이전했다. 김자수의 유적지에는 순절비각과 신도비, 상촌 시비, 묘역이 조성돼 있다. 순절비에는 ‘고려충신 상촌 김선생자수 순절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상촌시비에는 그의 절명시가 적혀있다.

지천서원(知川書院)은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다. 김자수와 김세필, 김저, 박상 등 8현을 제향하고 있다. 김자수의 마지막 벼슬이 충청도관찰사였는데 이때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다.

김자수 효자비는 그의 고향 안동시 안기동 주택가 좁은 골목길에 있다. 본래는 월곡면 노산리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3년 옮겨왔다. 비각은 정면1칸 측면1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비각 전면 밖에는 ‘정효비각(旌孝碑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비각이건기(碑閣移建記)’와 ‘상촌선생비각기사(桑村先生碑閣記事)’ 현판이 걸려 있다. 비석은 비좌와 비신, 보주현의 옥개석으로 이뤄져 있으며 비신 앞면에 ‘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효행이 기록돼 있다. 비문은 경상도관찰사와 판서를 지낸 김노경이 짓고 글씨는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가 썼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타양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안동시 가류2리 사찰골에 상촌선생 유촉비가 있다. 이곳은 김자수가 절에서 독학하던 자리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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