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예수는 “나는 여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모성에 대한 존중과 함께 그 말은, ‘세상 낮은 사람으로서의 여자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고대 히브리에서는 사람을 셀 때 여자는 세지 않았습니다. 그런 낮은 존재에게서 난 이가 자기라고 예수는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가 주인공인 영화를 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이라는 넷플릭스 영화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중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신앙적 비중이 높은 여성인물입니다. 기록상으로 그녀는 세 번 등장합니다. ‘예수 덕분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본 막달라 마리아’, 그렇게 세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집니다. 예수 부활 승천 이후의 본격적인 신앙공동체 생활 속에서는 그녀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열두 제자도 일곱 명의 최초 봉사자도 아니었습니다. 사제도 부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문학작품 속에서 이런 인물이 존재한다면 그 작품은 실패작 취급을 받습니다. 스토리라인에 큰 구멍이 하나 뚫린 것으로 치부됩니다. 오래된 역사 기록에 간혹 이런 누락이 있기도 합니다. 역사소설가들은 그런 공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꾸어 작품화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이라는 영화도 그런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그녀가 많은 갈등을 빚습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을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 영화는 예수의 영성(靈性)이 남성인 베드로보다 여성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더 많이 계승된 것처럼 묘사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영화 이전에도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그녀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그녀에 대한 오래된 오해(창녀설)가 공식적으로 바로잡힌 것도 금세기 들어서입니다. 그녀에 대한 부당한 오해가 오래 지속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궁색한 대처였다는 주장입니다. 당시의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는 풀기 어려운,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할, 문제 중의 문제가 바로 그녀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리는, 그녀를 일회성 사건으로 치부하는, 창녀설의 등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생각을 거부해도 좋다는 강한 암시’를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를 위시한 ‘반석주의자’들(개별적인 수행보다 예수의 교회가 설 수 있는 든든한 신앙공동체의 구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성을 강조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가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영화는 대체로 그런 맥락 위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신앙적 존재성을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래된 박대와 비하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예수교는 예수 부활 위에서 성립된 종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그녀가 바로 예수교의 반석인 것입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그녀에게 ‘여자의 아들’이 없었던 까닭이라 여깁니다. 그녀가 만약 예수의 아내였거나 하다못해 열두 제자 중 누구의 아내였다면, 그래서 그녀에게도 ‘여자의 아들’이 있었다면 그녀의 운명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식으로, 맹자나 율곡이나 한석봉 같은 현달한 아들이 그녀에게도 있었다면, 부활의 증인인 그녀의 성서적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모든 성당 입구에 모셔져 있는 성모 마리아상 옆에 그녀의 입상(立像)도 함께 모셔져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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