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22년 개봉한 ‘성덕(fanatic)’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도 누군가의 팬이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한때 내 전부를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좋아했던 연예인이 한순간 범죄자로 전락해버린 후, 한때는 ‘성덕(성공한 덕후)’이었던 팬들이 여러 가지 감정과 소회를 나누는 여정을 담고 있다. 자신의 우상(idol)이었던 존재가 그를 응원했던 이들을 철저히 기만하고 있었다는 분노와 배반감, 그리고 왠지 모를 죄책감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영화 곳곳에서 그들의 팬심에 담긴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1세대 아이돌의 전성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필자도 (영화 속에 출연한 이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이른바 ‘팬질’에 열중하던 때가 있었다. ‘오빠’의 프로필 사진이 담긴 엽서와 브로마이드를 수집하고,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만큼 노래를 듣고 음악방송과 예능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해 반 친구들과 돌려보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 되돌아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라이벌 그룹에 대해 경쟁심을 넘어 묘한 적대감을 품은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이 변화하는 것은 물론, 나의 인생에서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과도 같다.

영화에서 감독은 불미스러운 사건 후에도 이른바 ‘탈(脫)덕’을 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도대체 왜 어떻게 아직도 그런 인간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팬이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뭘까?” 떠나지 못한 팬들의 마음을 궁금해하던 와중 카메라의 시선은 한 정치인의 지지자들에게로 향한다. ‘연예인과 팬’을 이야기하다가 ‘정치인과 지지자’의 관계가 연상되어 이 둘을 유비적으로 풀어나가는 전개가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납득된다는 사실이 약간은 씁쓸하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권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 중에 ‘팬덤 정치’가 있다. 다만 특정 정당 및 정치인의 극렬 지지자들을 팬덤(fandom)에 빗대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연예인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의 마음은 조건부의 감정을 넘어선 순수한 것이다. 영화에서 한 팬이 말한다. “춤추고 노래하는 게 멋있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그 사람의 모든 것.” 이에 비해 정치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해당 정치인의 정치적 역량과 주장 및 메시지의 타당성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를 섬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설령 사람 자체를 지지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극성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기 삶의 일부로 들어와 있었던 연예인이 범죄, 불법행위, 혹은 일탈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영화 속 팬들은 자신의 아이돌이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을 마땅히 요구한다. 우리 사회에서 극렬 지지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명백하게 사실로 드러난 잘못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도 불순한 의도의 공격으로 매도하고, 불합리하고 반이성적인 보호 장벽(shield)을 둘러 쳐주고 있지 않은가. “수호”의 수사(修辭)를 통해 진정 보호하고자 했던 대상은 그 사람인가 배후의 진영인가. 팬덤 정치는 특정 정치인을 지켜주기보다는 그 사람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결국 정치적 진영논리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만다. 사실상 그들은 팬을 가장한 ‘거짓 팬’일 뿐이다.

혹자는 우리나라는 연예인이 정치인 같고, 정치인이 연예인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연예인이 정치인보다도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고, 사소하든 중대하든 물의를 빚었을 경우 즉각적으로 사과하며, 이에 응당한 책임 및 책무를 지도록 실질적으로 강제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이 말에 일정 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는 연예인의 팬과 정치인의 지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 같다. 자신이 한때 가장 동경했던, 반짝거리는 별과도 같았던 연예인에 대한 팬심을 힘겹더라도 버릴 수 있는 ‘이성’(理性)을 가진 자만이 진정한 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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