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림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호림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지난 28일 대학생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안동대학교 게시판에 “개강하면 흉기로 사람을 찌르겠다. 다들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글이 업로드되었다. 개강을 앞두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불안감이 빠르게 확산되었지만, 글을 올린 학생이 하루 만에 자수를 함으로써 다행히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학년으로 알려진 이 학생은 경찰 조사 과정에서 “관심받고 싶어서 글을 썼다.”고 진술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일어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 이후 온라인상에 살인예고 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안동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같은 안동대 구성원으로서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더욱이 ‘관심’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관심은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정은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인간 사이의 모든 갈등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되며, 인정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네트(Axel Honnethe)는 ‘인정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기도 했다. 호네트에 따르면 인간은 사랑, 권리 그리고 연대를 통해 타인의 인정을 경험함으로써 긍정적 자기의식을 가지게 되며, 성공적인 자아실현의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사랑은 본능적 욕구와 정서를 지닌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인정관계이고, 권리는 이성을 지닌 보편적 존재로서 인간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인정관계이며, 연대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 특수한 존재로서 인간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인정관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살인예고’와 같은 행위는 어떤 종류의 인정투쟁일까? 타인에게 어떤 인정을 바라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동원하며 그토록 관심을 갈구하는 것일까? 사랑? 권리? 연대? 사실 살인예고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으며, 왜곡된 인정투쟁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인정투쟁은 ‘나’를 인정받기 위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인정해야 하는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과 전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단순히 생존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자기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자기실현을 위해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전제는 나의 삶이 나에 대한 타인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인정은 나의 자아실현뿐 아니라 타인의 자아실현을 보장하는 조건이며, 결국 인정투쟁에서 중요한 점은 ‘상호 인정’이라는 나와 타인 사이의 윤리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살인예고는 상호 인정이 아닌 일방향적인 폭력에 가깝다. 더욱이 살인예고는 보통 온라인상에서 ‘익명’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 아이러니는 타인을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우월감을 느끼려는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정투쟁은 나를 감추기보다 드러내고, 타인을 위협하기보다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갈등과 저항이 일어나는 기저에는 구성원들이 현존하는 제도적 현상들을 정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놓여 있다. ‘인정’의 측면에서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사회적 무시가 만연하거나 사회적 인정요구가 훼손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정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하나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의롭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나의 인정 욕망을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익명이라는 벽 뒤에 숨어서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사회적 통합을 강화하는 방법은 인정관계의 확대에 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고립감을 느끼더라도, 그럴수록 더 타인을 인정하고 상호 관계성을 형성하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 타인을 먼저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인정투쟁의 첫 번째 원칙이자 충분조건이다. 만약,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인정투쟁은 왜곡된 방향으로 굴절될 수밖에 없으며, 타인을 향한 폭력에 가까운 몸부림은 칼부림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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