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윤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김동윤 대구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재즈(Jazz),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미국의 흑인 음악에 클래식, 행진곡 따위의 요소가 섞여서 발달한 대중음악 장르다.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운율의 독특한 리듬감이 강조되는가 하면, 즉흥적 연주를 중시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섞이고 혼재되면서도 서로 이질적인 음악적 요소들이 절묘한 리듬과 화음으로 어우러진다. 저마다의 음악 장르가 가진 정통성과 역사성에 새로운 트랜드가 가미된 혼종성을 추구하며, 정형화된 패턴보다는 변형과 변화 가능성을 추동하므로 재즈는 가히 열린 음악이다.

열림은 곧 수용이다. 수용은 다름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가치를 향한 무한한 변화 가능성을 선호하며, 따라서 융복합과 통섭도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결과적으로 재즈는 기존 레거시의 정통성과 계몽과 이성에 뿌리를 두는 모더니즘보다는 감성과 개성, 자율성, 다양성 그리고 대중성을 필두로 새로움을 향한 해체와 재구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이종사촌쯤 된다.

재즈가 4차 산업혁명시대와 무척이나 조화되는 까닭이다.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새로움과 다름을 추구하며, 둘의 절묘한 앙상블과 컬래버레이션을 추구한다. 뉴올리언스재즈, 스윙재즈, 모던재즈, 프리재즈 등 수없이 다양하게 세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즈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 왔으며, 연주 스타일에 따라 각기 다른 음악으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어떤 스타일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발생지의 지명을 붙여서 일컬어지기도 한다. 재기발랄하고 자유분방 그 자체다.

감성은 또 어떤가. 시쳇말로 ‘오진다!’. 재즈만의 부드러움과 멜랑꼴리는 ‘나’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도록 한다. 재즈가 주는 감성은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이 책의 출간과 재즈에 대한 인기와 사랑의 궤가 겹치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놀이가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듯, 포스트모던한 재즈만의 그 독특한 감성과 감수성 그리고 화음과 리듬은 그 자체가 일상을 놀이로 대하고 즐길 것을 요구한다. 삶의 시공간 속에서 두드러지거나 과하지 않으나 모자라지도 않는 민중의 호흡이자 삶의 율동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재즈와 보사노바가 스타벅스 카페 음악으로 넘어온 것은 그러므로 대단히 전략적인 마케팅이라 할 것이다.

대학도 그렇다. 이제 물리적 공부 장소나 도서관이 필요치 않다. 아니 오히려 혹은 차라리 부숴야 한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박살 내는 퍼포먼스로 모더니즘과의 결별을 선언할 것처럼, 대학은 도서관을 부숴야 한다(아! 설마 물리적 폭발로 오해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은 대단히 모더니즘적이기만 하다. 포스터모던한 학습은 ‘공감하고 공유하고 즐기고 적용하고 분석하고 새로움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험과 평가를 위한 암기와 이해 위주의 주입식 교육과 공부가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서열화된 대학에 자기 점수를 목에 건 채로 대학 정문에 긴 행렬을 할 수밖에 없는 초중고 교육은 기계교육만 강요할 뿐이다. 티칭을 넘어 코칭 기반 학습 혁신이 일어날 수 있어야 미래 교육에 다가설 수 있다. 당연히 이론과 실험에 능수능란한 박사 출신 교수의 자격과 역량만으로는 대학이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다. 더불어 학문으로서만 먹히는 교육으로는 승부가 안 된다. 사람과 삶과 현장과 산업과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엮이도록 하지 않으면 대학의 기능과 역할의 존재 이유가 더는 먹히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수행 ‘했고, 하고 있고, 할’ 이론과 가설을 검증하는 일은 학문과 연구로서는 불가피하지만, 지독히도 모더니즘적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반증가능성을 통해 새로운 이론과 가설과의 대화와 만남이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되지만, 속도와 변화의 폭에서 현실의 흐름과 요구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음이다. 일부분이 아니라 디디고 서 있는 기반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재즈의 혼종성, 대학교육이 정면교사 삼아야 한다. 전공이나 학과 벽 허물기는 재즈의 열림과 수용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 즐기고 창의하는 교육은 재즈의 루덴스적 감성과 감수성이 보사노바로 성공적으로 이첩된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말로만 하는 교육혁신이 아니라 마음으로 공감하는 혁신 나아가 실행되는 혁신이어야 한다. 미국의 재즈가 1960년대 브라질에서 탄생해 또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간 보사노바처럼, 재즈의 성공적인 실험과 도전을 대학혁신의 바로미터와 방향타로 삼아야 한다. 재즈로부터 큰 영향력을 받은 보사노바는 포르투칼어로 ‘새로운 경향’이다. 대학혁신, 재즈에 묻고 보사노바에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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