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요즘 문해력이라는 말이 많이 떠돕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문식력이 하향 평준화되면서 부쩍 문해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 와중에 학습력의 하위분야로 문해력을 끼워 넣으려는 지식장사꾼들의 활약이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조식, 중식, 석식의 중식(점심)을 중국요리로 읽고, 사흘(3일)을 4일로 이해하고, 직접 경기장이나 공연장에 가서 관람하는 것을 직관한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 등이 눈에 띄는 악성 문식력 하향의 예로(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자주 거론됩니다.

그런 문식력 부족(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을 문해력 향상 프로젝트를 통해서 넘어서 보겠다는 시도도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문해력은 독서를 통해서 증진되는 것이기에 어떻게 하면 독서교육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소위 ‘읽기의 과학’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수학에 왕도가 없듯이 읽기에는 과학이 없습니다. 문해력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작품이나 철학적 에세이를 읽고 그 안의 것을 자신의 정서적, 인격적, 인생론적 차원에 능동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차원 높은 맥락적 독서를 할 수 있는 능력(문장의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표면적인 문장의 뜻(표층적 메시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장(텍스트) 이해(학습)능력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지식의 습득만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습니다. 따로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문해력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책 읽는 일이 무척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다”라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일입니다. 때로는 그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 학습 시간을 침범할 때도 있습니다. 교사나 부모는 그런 ‘충돌의 기회’를 아이들에게 빼앗지 않아야 합니다. 그 ‘충돌의 와중’을 잘 헤쳐나오는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숙성된 교양인이 될 공산이 큽니다. 개별화 과정도 원만하게 진행되어 사회적인 인간관계도 잘 형성하게 되고요. 그런 독서의 과정과 효용을 간과하고 그저 책을 많이 읽게 해서 대학입시에 필요한 교과지식을 빠르고 깊고 넓게 확충하는데 큰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는 일부 학부모들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을 연출해 낼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 아이가 초중고 시절에 “문학작품(시나 소설)이 정말로 대단한 것이구나!”라고 크게 깨우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가장 좋은 문해력 신장 방안입니다. 독서는 생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실천의 영역입니다. 오랜 시간 육체적으로 제한을 받아야 하고 심리적으로는 고립감을 감수해야 합니다(보통은 책 속의 인물이나 사건에 동화되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단련 과정(책과의 대화)을 통해서 성숙한 한 사람의 개별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런 것이 독서의 과정이고 문해력의 요체인데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과외를 받아가며(3당 4락) 열심히 교과지식의 습득에만 몰입해 온, 초중고 시절에 충돌의 기회와 시간과는 아주 담을 쌓고 지낸 학자(교육학자, 심리학자, 독서교육학자)들이 모여서 ‘읽기의 과학’을 만들어 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무용지식의 집합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타 영역(교육학, 심리학)의 지식과 문법, 문장론의 지식들로 잡채처럼 버무린 사상누각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독서의 세계이고 문해력의 세계입니다. 진정한 읽기의 경지는 ‘역지사지(타자공동체 지향) 견물생심(사물 감응능력)’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별적 실천의 영역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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