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연 포스텍인문사회학부 교수
정채연 포스텍인문사회학부 교수

기존의 체계를 새로이 전복적으로 재편성하는 이른바 ‘와해적 기술’로서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탈근대시대의 철학 및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신뢰 가능한 매개자 없이 P2P 네트워크 방식에 기초하는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바로 탈중앙화라고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신뢰의 새로운 아키텍처’로서 기능함으로써 기존의 중앙화된 체계에 대한 혁신적 균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능정보사회에서 더 심화되는 데이터의 중앙화에 대한 시민사회에서의 우려는 탈중심적이고 분배적인 네트워크로의 전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의사결정의 권한과 책임, 통제권을 분산시키는 데이터 거버넌스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청이 강화되어 온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는 기술적 자유주의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프라이버시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권리 주장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의 대중화와 자유주의적 권리 주장은 인터넷 기술을 배경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운동으로 전개·발전되기도 하였다. 사이버펑크는 개인의 사적 자유를 확보하고 정부 권력을 약화시키며 그 운영과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데 있어, P2P 기술과 암호화를 유용한 도구로 이해했다. 전통적인 규제방식의 변화를 통한 자율적인 권한의 분배를 지향하는 네트워크 사회는 인터넷 사이버 공간의 창출로 인해 그 실현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몽과 같이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궁극적으로 극복했다고 보기 어려운 과거 혁명의 양상과 달리,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는 시민운동으로 그 양상이 변하게 되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해볼 수 있다. 이러한 인터넷 공간을 국가법의 공식적 관할 영역으로 삼도록 하는 미국 정부의 통신법안에 대한 저항의 표출로 발표된 ‘사이버 공간의 독립선언문’은 정부 기관에 의한 침탈이 새로운 감시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 기술은 국가, 법, 제도의 강력한 개입과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사이버펑크의 자유주의적 시대정신과 사조는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이념적으로 계승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추적해보면 인간사회는 수렵채집에 기초한 원시사회에서부터 수백만 년에 걸쳐 P2P적 관계를 바탕에 두고 성립·발전해왔지만, 농경사회에서부터는 대규모의 공동체 사회로 이전하게 되면서 상호신뢰를 확보할 수 없는 타인들과도 공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군주제를 비롯한 중앙집권적 제도 및 체계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대적 국민국가가 수립된 이후에도 위임된 권력의 남용이 가져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중앙집권적 체제는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지식의 독점을 막는 인쇄술과 탈국가적 공간의 출현을 가져온 인터넷 기술 등 탈중심적 패러다임 전환을 꾀한 기술 역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해 왔으며, 블록체인 기술은 탈중앙화 시스템의 역사적 실현 가능성을 다시금 본격적으로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곧, 블록체인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정치·제도적 개혁을 추동하는 시대적 이데올로기 및 철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정부의 중앙화와 빅 브라더 감시사회에 대한 비판적 저항을 바탕으로, 불필요한 혹은 대체 가능한 국가적·법제도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암호화를 통해 프라이버시 및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블록체인 민주주의 및 탈중심적 거버넌스 담론의 핵심적 주장이라 볼 수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블록체인 거버넌스의 와해적 혁신”(포항공대신문, 2023)에서 제시한 단상을 칼럼 형태로 수정·보완 및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