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 소설가
권소희 소설가

호주 생활 8년 동안 인생의 쓴맛을 보았으나 한국살이는 아득했다. 나는 마치지 못했던 대학 졸업증이 마음에 걸렸고 남편의 일자리도 신통치 않았다. 앞으로 재고 뒤로 재도 도저히 한국에서는 두 딸을 대학을 마치도록 뒷받침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설사 남편이 제빵 기술자격증을 딴다거나 일식 요리사 자격증을 딴다 한들 당장의 입에 풀칠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간신히 친정과 시댁을 설득해서 중간에 포기했던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되었다. 워낙 오랫동안 휴학을 했던 터라 입학금을 다시 내고 수강신청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다들 뜨악하게 여기며 혀를 찼다. 그 나이에 대학은 졸업해서 뭐하냐? 시집갈 것도 아닌데.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나 혼자 사회시스템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교육제도가 잘못됐다고 자성의 소리가 높지만 말뿐이다. 사회는 불합리하게 돌아갔고 35살의 애 엄마는 입학금을 다시 내고 2학년을 시작으로 38살에 졸업 학사모를 간신히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뿐이었다.

대학 졸업한 그해, 1997년 11월에 시작된 IMF 사태는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외환위기’라는데 정확히 그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편은 매일 구조조정의 눈치를 살펴야 했으며 1998년에 거머쥔 나의 졸업장은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인생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건 내 의지와 상관없는 듯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에게 미술지도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다. 아름아름 소문이 났는지 그림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제법 늘었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미술학원 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불법과외이니 고발하겠노라고.

남편과 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뜨기로 결정했다. 가진 돈이라곤 전셋돈이 전부였으나 그 돈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유학원을 찾아다녔다. 미국 내에 있는 한의대에 입학원서를 받아 든 남편은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고 나와 두 딸은 후에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딸을 데리고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대사관에 인터뷰를 가던 날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유학원에서 만들어준 서류뭉치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명창구에서 마주한 영사가 ‘xxx 서류를 보여 달라’며 내가 제출한 서류뭉치를 가림막 밑으로 내밀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하얘졌다. 인터뷰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나는 영사가 내민 서류뭉치를 도루 들이밀며 말했다. 그 안에 다 있노라고.

돌이켜보면 황당한 제스추어가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손하게 여길 법한 태도였다. 그 영사에게 떠듬거리는 영어로 가족이 떨어져 살 수 없어서 두 딸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미국입국 비자승인은 났고 일이 되려고 했던지 전세도 밤 12시에 계약을 하게 되었다. ‘중개사 생활 20년에 한밤중에 계약서를 작성해본 것이 처음’이라던 중개사 아저씨의 농담은 사실이었다. 모든 게 다급하게 일이 추진됐다.

미술학원원장의 고발 협박만 없었다면 미적거리며 한국에서 눌러앉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자의 협박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아마 미술학원이라도 차려서 한국에 완전히 눌러앉고 말았을 테다.

이민보따리를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망가진 한국경제와 뿌리 깊은 학벌 위주의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이듬해에 다시 조국을 등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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