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국 고문헌연구소 경고재 대표·언론인
최병국 고문헌연구소 경고재 대표·언론인

사람이 불의나 정의에 반하는 사태를 직면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절명(絶命)을 취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거나 항거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해 목숨을 끊는 애국지사와 충신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근세 들어서는 단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경우가 있다. 절명에는 죽음의 이유를 주변에 알리는 ‘절명시’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절명시로 순국지사 매천 황현(黃玹)을 꼽는다. 1910년 한일 합병의 소식을 듣고 황현이 “사대부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宗社)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면서 음력 8월 7일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한다. 그는 죽음에 앞서 4수의 절명시를 남겼다. 첫째수에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노/그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했건만 그러질 못했구나/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수가 없으니/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그가 절명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자 호남지방에는 삽시간에 “지리산 구례 땅 월곡리에 은거하던 한 선비가 절명시를 남기고 죽었다”는 소문이 일시에 퍼지면서 전국으로 알려졌다. 3·1운동의 단초가 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도 조선 관군과 현대식 무기를 소지한 일본군에 의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후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돼 1895년 3월 29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24시간도 안 된 이튿날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도 죽기 전 절명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하늘과 땅도 힘을 합하더니/운이 다하니 이 몸도 어쩔수가 없구나/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애국심이 절절히 드러난다.

근세 한국인의 뇌리에 박힌 극적인 단식 장면은 죽음을 각오하고 23일간 곡기를 끊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YS)을 첫째로 꼽는다. 그는 1983년 5월 30일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자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5개 항을 내 걸고 군부에 저항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단식 2주 가까이 되자 생명까지 위태로워지자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말 큰 변을 당할까 대내외적인 압력을 우려해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입원 중에도 곡기를 끊고 단식을 이어가다 23일째 되는 날 의료진에 의해 극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는 한국에서 단식으로 국내외 언론과 정치 판도를 바꾼 전무후무한 사례로 남았다.

지난달 3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정권의 폭정을 저지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기한 단식을 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국민의 반응은 “왜 하는가”며 무관심하다. 이 대표의 단식을 두고 정치권의 여론도 ‘걱정’보다는 “방탄 단식하나”라는 꼬리가 이어졌다. 같은당의 의원(이상민)도 “명분도 실리도 없다”며 단식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 대표는 지난 12일까지는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는 공개 장소에서 이후는 대표실에서 단식을 해 왔다. 당무로 간혹 자리를 비우는 단식도 겸했다. 이 때문에 ‘라마단 단식’ 그의 보온병 내용물을 두고는 ‘보약’ ‘사골 국물’‘미숫가루’란 억측까지 나온다. 어쩌다 이 대표의 단식이 이렇게 희화화됐나. 원래 단식은 성스럽고 종교적 행위다. 예수는 40일간 사막에서 단식기도를 했고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6년간 단식과 같은 극한고행을 했다. 단식 15일째인 14일부터 이 대표는 체력저하로 대표실로 옮겨 단식을 하고 있다. 그는 단식 기간 검찰에 두 번씩이나 출석해 조사까지 받았다. 머잖아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으로 알려지고 있어 도대체 이 대표는 단식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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