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 아래 표지.
올리브 나무 아래 표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한결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 박노해 시인.

그가 천년의 올리브나무의 오래고도 푸르른 품으로 우리를 이끈다.

1998년 출소 이후, 시인은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의 길을 뒤로 하고 20여 년간 좋은 삶이 깃든 ‘다른 길’을찾아 세계의 가장 높고 깊은 마을을 유랑해왔다.

삶의 화두와도 같은 주제로 ‘박노해 사진에세이’ 시리즈를 선보여온 그가 이번 가을 여섯 번째 사진에세이 ‘올리브나무 아래’를 펴냈다.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에서 눈물과 기도로 담아온 37점의 사진을 통해, 올리브나무가 지닌 ‘신성한 빛’과 ‘강인한 힘’을 전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실수이자 가장 오래 살아남는 나무로 “신이 내린 선물”, “나무중의 으뜸”이라 불리며 수많은 신화와 경전에 상징처럼 등장하는 올리브나무.

고대의 정취가 어린 올리브나무 숲에서부터, 대대로 그 땅의 사람들을 묵연히 지켜주는 나무,

거대한 분리장벽 앞에 최후의 전사처럼 홀로 선 나무, 천 년의 기억을 품고도 아이 같은 새잎을 틔우는 올리브나무까지. 역경의 삶을 살아온 박노해 시인에게 올리브나무는 고난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존재다.

“척박한 땅에서 온몸을 비틀며 자신을 짜 올려, 고귀한 열매와 기름과 사랑으로피고 맺은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

나에게 올리브나무는 오래고도 한결같은 사랑 그 자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 나는 천 년의 올리브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쉬고 다시 나의 길을 간다.”(10p ‘서문’ 중)

책 속에는 올리브나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믿음 아래, 올리브나무와 함께 자라나고, 노동하고, 저항하고, 꿈을 꾸고, 기도하고, 올리브나무 아래 묻히고, 다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가

슴 시린 이야기가 담겨있다.

나아가 일상조차 위태롭고 각자도생으로 떠밀리는 현대인들에게,박노해 시인이 들려주는 올리브나무 이야기는 깊은 성찰을 건넨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이들은 성공을 재촉당하고 어른들은 성과를 부정당하고, 난폭한 권력과 안주한 세력이나라의 위기를 불러오고, 탐욕과 혐오와 적대와 환멸을 불지르고 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누구 하나 바라볼 사람이 없고, 불안과 우울과 무력감 속에 덧없는 행복과 위락에 탐닉하고 있다.

세상이 다 이렇고 인간은 이런 거라고 ‘악의 신비’가 드리울 때면, 나는 천 년의 올리브나무를 바라본다.”(10p ‘서문’ 중)

우리가 잃어버렸지만 사실 간절히 기원하는 것은 올리브나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픈 역사도 빛나는 순간도 묵연히 지켜보며 함께하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존재 말이다.

박노해 시인은 아무리 시대가 그래도, 우리 주변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양심과 원칙을 지켜가는 사람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아가며 선한 메아리를 울려오는 사람들. 나에게 빛이 되고 힘이 되고 길이 되는 사람들이 올리브나무처럼 몸을 기울여 나를 기다리고 있다”(11p ‘서문’ 중)고 말한다.

이런 시대에 희망의 단서인 나 하나를 지켜내고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걸어가는 용기를 내자고 우리를 북돋는다.

척박한 광야에서 작은 올리브나무 하나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다면 “나무는 나무를 부른다. 숲은 숲을 부른다. 오랜 기억과 투혼을 이어받은 후대가 힘차게 자라나는 땅에서, 희망은 불멸”(100p)이라고 말이다.

‘올리브나무 아래’ 책에 수록된 모든 사진을 인화된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도 열린다.(2023.10.4~2024.8.25, 서울 서촌 ‘라 카페 갤러리’) 전시 관람 후, “눈물로 맑아졌다”는 고백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는 다짐이 이어지는 박노해 사진전. 2010년부터 진행된 박노해 사진전에 다녀간 관람객은 어느덧 38만 명이 넘는다.

장인이 암실에서 한 장 한 장 인화한 아날로그 흑백사진, 단편소설만큼의 이야기를 응축한 캡션, 그리고 시인이 엄선한 월드뮤직이 흐르는 ‘라 갤러리’에서 들어서면 잠시 다른 시공간 속으로 옮겨온 듯 올리브나무 숲이 펼쳐질 것이다.

천 년의 기억을 품은 나무가 온 힘을 다해 푸른 가지 끝에 틔운 새잎 같은 책 ‘올리브나무 아래’.

이번 테마를 떠올리게 하는 올리브그린 색의 패브릭 커버가 품격을 더하고, 천 위로 아름 하게 새겨진 올리브나무 그림에는 이파리 하나하나마다 신비로운 빛이 감돈다.

그대 곁의 이 책 한 권이 천 년을 이어온 사랑의 올리브나무처럼 그대와 동행하기를. 어려울 때나 힘든 날에도 그대 마음에 신성한 빛과 푸르른 힘을 채워주기를.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고 지켜주는 나무 하나. 그토록 묵중하고 한결같은 사람 하나. 천 년의 올리브나무 아래.”(11p ‘서문’ 중)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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