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성 '학익진' 유인…임진왜란 최대 전과 올렸다

하늘에서 본 금호서원. 서원 앞의 못은 풍양지다.

△녹둔도 전투에서 만난 이순신과 이운룡

함경북도 경흥은 두만강과 동해가 만나는 국토의 끝이다. 여진족과 마주 보고 있는 국경지대여서 어느 하루인들 조용한 날이 없었다. 경흥에 녹둔도라는 섬이 있는데 지금은 모래톱이 밀려 육지가 되면서 러시아 땅으로 편입됐다. 녹둔도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사들의 직접 농사를 짓는 둔전이 있는 곳이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경흥 일대를 방어하는 조산보만호와 녹도 둔전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1587년 10월 10일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이 백성들을 데리고 녹둔도에서 추수를 할 때 여진족이 쳐들어와 군사 10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과 군사 160명을 잡아갔다. 말과 곡식도 탈취해갔다. 이순신은 그날 밤 젊은 무관 이운룡을 불러 포로 구출작전을 펼친다.
 

이운룡신도비. 금호서원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운룡(李雲龍·1562-1610)은 1585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자격으로 첫 실전 배치된 24살의 젊은이였다. 이운룡이 선봉에 섰다. 녹둔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형을 살핀 뒤 밤에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주둔지를 치고 들어갔다. 적의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체포하고 적진지를 초토화했다. 포로 60명을 구출하고 적의 목 383급, 말 9필, 소 20마리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이운룡은 이때 쌓은 전공으로 뒤에 옥포만호로 승진한다.

△원균에게 이순신과의 합동작전 권유

임진년(1592) 4월 13일. 왜군 선단이 가덕도에 있는 응봉봉수대 관측병사의 눈에 들어온 시간은 오후 5시께였다.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선 700여 척이 가덕도 남쪽 앞바다를 까맣게 뒤덮었다.

‘약 90여 척의 왜선이 추이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해 항해 중인데 뒤에도 계속 배들이 오고 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왜선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몰려온다는 봉수대의 보고를 받고 하얗게 질렸다. 그는 즉각 수영을 버리고 언양을 거쳐 경주로 도망쳤다. 정발이 절영도에 나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다음 날 부산진성에 들어가 항전했으나 전사했다. 왜군은 기세를 몰아 동래성으로 몰려왔다. 동래성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경주로 달아나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왜군의 다음 목적지는 거제도였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싸우기도 전에 도망쳤다. 그는 100척이나 되는 배와 화포 등을 바다에 수장 시키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 왜군을 만나기도 전에 스스로 진영을 무너뜨린 뒤 남해현 앞바다를 떠돌았다.

옥포만호 이운룡(1562-1610)은 그때 남해현 앞바다에 있었다. 그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제하에 있는 부하장수였다. 원균에게 남은 배는 전선 4척, 협선 2척 밖에 없었다. 적들은 자신의 관할지역인 옥포 거제로 오고 있는데 원균은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오직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이운룡은 자신의 관할지를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균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장군은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우리는 마땅히 죽음으로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전라 충청도의 방어선이니 이 지역을 잃게 되면 전라 충청도를 잃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우리가 지금 곤궁한 처지에 빠졌으나 아직 전라수군이 건재하니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청하십시오. 견내량을 막고 끊어 적군이 거제도를 지나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역할은 성공입니다.”

이운룡은 이순신과 접촉할 인물로 율포만호 이영남을 추천했고 이영남이 이순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나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첫째 지금 왜적은 모든 힘을 육지에 쏟고 있어 수군이 약하다. 둘째 경상우도 바다 방어선이 깨지면 결국 전라좌도도 위험하다. 경상우도 관할에서 경상우도수군과 연합해 적을 깨뜨리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5월 7일 옥포에서 첫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선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로 나와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인 전부인 원균부대와 합세한다. 조선수군은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동서로 포위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26척을 격침시켰다. 이어 합포 앞바다에서 적선 5척, 다음날 적진포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웠다. 이날 전투는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조선수군은 살아있다’ 왜군은 더 이상 조선의 바다를 안방처럼 누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양까지 올라갔던 왜군은 이제 뒤를 돌아보며 진격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운룡영정.1604년 선조가 이운룡을 임란선무공신에 올리고 식성군에 봉하면서 내린 초상화다.

△적을 한산섬 앞으로 끌어낸 이운룡

한산 대첩을 앞두고 이운룡은 조심스레 이순신을 찾아갔다. 이운룡 자신은 원균 지휘하에 있고 이순신은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원균과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판옥선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학익진(鶴翼陣)을 칠 생각이었다. 문제는 덩치가 큰 판옥선으로는 좁은 수로에 섬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견내량을 지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를 잇는 신거제대교와 거제대교가 있는 해협이다. 왜군이 스스로 견내량을 지나 학익진을 치고 있는 한산도 앞으로 나오도록 유인하는 작전이 필요했다. 견내량을 가장 잘 알고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 왜군을 유인해 올 장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견내량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할이다. 원균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그때 이운룡이 나타났다.

이운룡은 왜군에게 결정타를 먹여야 할 곳은 견내량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운룡은 견내량 물길을 손금 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원균이 개전 초기 도망 다닐 때에도 견내량에서 적을 깨뜨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이다.

“제가 견내량을 잘 압니다. 목숨 걸고 적들을 견내량 밖으로 적을 유인해내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순신이 이운룡의 손을 꽉 잡았다. 1592년 7월 8일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이운룡이 지휘하는 6척의 배가 왜선 73척이 있는 견내량으로 들어가 약을 잔뜩 올렸다. 적들이 뒤를 쫓아왔다. 조선 수군 56척이 견내량 밖으로 도망쳐오는 이운룡의 배들을 구하러 오는 척하다가 돌아서 함께 도망쳤다. 왜군 대장선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선을 재촉했다. 그는 한 달 전에 1600명의 군사로 용인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 5만 명을 격파한 장수다. 일본의 최정예 장수로서 자부심이 높았던 와키자카는 조선 바다마저 장악하려 했다.

한산도 앞 상죽도와 하죽도 앞에 이르렀을 때 북소리가 울렸다. 조선의 전함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반원형을 그리며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학익진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학익진에 걸려든 왜군은 힘을 쓰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반원을 그려 선단을 펼쳐서 가운데 있는 왜선에 집중 포격을 가하는 동안 왜선은 사방에 부챗살처럼 퍼져있는 조선수군을 상대하느라 화력을 분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는 반나절도 안 가서 끝이 났다. 왜선 47척을 격파했고 12척을 포획했다. 7척이 겨우 달아났다. 5만8000명의 왜군 가운데 4만 명이 죽은 반면 조선수군은 전사 19명 부상자 11명에 그쳤다. 이 전투 결과 조선은 남해를 장악했다. 의주까지 올라갔던 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적의 대군 앞에까지 나아가 적선을 유인한 이운룡이 큰 공을 세운 전투였다.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의 저자 고미숙은 이운룡을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천재 전략가’로 소개했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올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수사를 역임했다. 1604년 선조는 이운룡을 식성군에 봉하고 선무공신 3등에 올린다. 이듬해 1605년에는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될 당시 오랜 전투와 바다 생활로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전쟁 당시 맞은 화살과 창으로 병을 얻었고 사직 상소를 올렸다. 1607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사직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쉬지 못했다. 함경도 변방이 어지러워지자 함경도 남도병마절도사로 임명돼 변방 수비를 강화했다. 1609년 충청도 수군절제사로 갔다가 이듬해인 161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 때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9세 때다.
 

이운룡이 태어난 청송군 매전면 온막리에 있는 광명대용송비. 이운룡이 어릴 때 심은 소나무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은행나무를 심었다.

△이운룡의 유적

이운룡은 1562년(명종 17년)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현(景見)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이다. 남해현령을 지낸 이몽상이 아버지다. 이운룡이 죽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증직했다. 신도비와 기적비를 전승지인 통영에 건립했다. 거제옥포 2동 옥포대첩기념공원에 ‘영세불망비’가 건립됐다.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에 있는 금호서원. 임진왜란 명장 이운룡을 제향하는 곳이다.
금호서원 뒤에 있는 현충사. 이운룡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곳이다.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이운룡을 제향하기 위해 1818년(순조18) 청도군 이서면 금촌리에 세운 서원이다. 지금은 이백신도 함께 배향하고 있다. 강당인 충의당과 사당인 현충사가 있으며 강당 앞에서 동서재를 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다. 봄가을 향사를 지낸다. 의령 기강서원에도 배향됐다. 이운룡이 태어난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 용송표지석이 있다. 용송은 이운룡이 어릴 때 심은 소나무인데 사방 16척 높이 55척이 돼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 이름했다고 한다. 노송은 관리부실로 고사하고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고 용송표지석과 기념비를 세웠다. 용송 앞의 들판은 이운룡이 임금에게서 받은 들판이라고 해서 ‘임금들’이라 하고 달팽이산은 역시 ‘임금산’이라고 불렀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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