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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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
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
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걸


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
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
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감상]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라는 구절 때문일까? 토각귀모(兎角龜毛)라는 말이 떠오른다. ‘토끼뿔’과 ‘거북털’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없는 것, 실체가 없는 것,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다. 효봉 스님의 법문에 이런 게송이 있다. “사람이 사상(四相)의 산을 넘으려면 토끼뿔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사람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려면 바닥없는 배를 타야 하리라.” 없는 것이 마음이다. 다만 없는 줄 모를 뿐. 그래, 이걸 우리 마음이라고 하자.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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