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림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호림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어느덧 2023년의 마지막 주이다. 연말(年末)이라는 표현이 어느 때보다 잘 어울리는 주간이다. 연말이 되면 꼭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데, 정말 2023년처럼 다사다난했던 해는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생성형 AI인 ChatGPT를 위시한 여러 종류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학계와 산업의 판도를 뒤집어놓기도 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디지털 인문학(DH) 분야가 약진했고, 주변에서 AI와 무관한 사업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미국의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023년 올해의 단어로 ‘진짜(authentic)’를 선정한 것, 그리고 영국의 케임브리지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환각(hallucinate)’을 선정한 것은 AI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2023년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 또는 환각에 빠져있는 시대로 본 것이다. 점점 객관적 사실과 진실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환경 속에서 진실 너머의(post truth) 무엇인가가 점점 시대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할까? “교수신문”에 따르면,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다고 한다. 전국 대학교수 131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30.1%(396표)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라는 ‘견리망의’를 선택한 것이다. 견리망의라는 사자성어의 이면에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권의 현재가 존재한다. 정치인들이 출세를 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자기편에 이로운 방향으로만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다고 보는 것이다. 2위는 25.5%(335표)를 기록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고, 3위는 24.6%(323표)를 기록한 ‘남우충수(濫竽充數)’이었다. 적반하장은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는 뜻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남 탓만 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사자성어이다. 남우충수는 ‘피리를 불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피리 부는 악사들 틈에 끼어 인원수를 채운다’는 뜻으로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義)는 올바름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견리망의는 이익 앞에서 그런 구별 능력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적반하장이나 남우충수는 책임져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또는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준다. 견리망의, 적반하장, 남우충수는 결국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도덕적 토대나 행동 방식의 기준이 되는 엄밀한 잣대를 잃어버렸음을 인정하는 사자성어이다. 정치적 맥락을 살짝 벗겨내면, 견리망의나 적반하장, 남우충수는 미국과 영국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진짜(authentic)나 환각(hallucinate)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것이 인간만의 가치이든, 정의이든, 진실이든, 올바름이든 간에 잣대가 무너지면서 무엇인가가 상실되었던 한해가 바로 2023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견리망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이익 앞에서 철저하게 망각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2023년 한 해 동안 조금 더 경제적 이윤을 남기기 위해, 조금 더 학문적 성과를 내기 위해, 조금 더 조직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진짜 중요한 무엇인가를 뒤로하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필자가 근무하는 조직도 마찬가지다. 1학기에는 인문사회융합인재양성사업 선정을 위해, 여름방학 때부터는 글로컬대학30 지원사업 선정을 위해 대학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한 미래 계획은 등한시하고 오로지 사업 선정만을 위한 움직임만 반복했던 것 같다. 정치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 가져와야 하는 이익 앞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지향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질문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2023년은 또 다른 반성을 요구하는 해이다. 견리망의의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2024년에는 이익 앞에서도 의로움을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인간만의 무엇인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내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연말의 남은 기간 동안 수많은 모임과 행사로 정신이 없겠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견리망의에서 견리사의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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