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일 前 포항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시인
배연일 前 포항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시인

외국어 남용(濫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최근 들어 일반 국민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사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쉬운 우리말로 해도 뜻이 통하는데 굳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정부 관계자, 정치인, 교수 등이 포함된다. 더욱 유감스러운 건, 언론을 선도(先導)해야 할 위치에 있는 각종 언론매체도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는 점이다.

주지(周知)의 사실이듯 요즘 신문이나 TV에서 외국어를 보고 듣는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특히 외국어가 들어가지 않은 TV 광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러다 보니 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고학력자들 가운데서도 요즘 언론매체를 보면 모르는 용어가 적지 않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저학력자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소외감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신조어까지 활개를 치고 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외국어 사용이 도를 넘고 있는데도 관계 당국과 국어 관련 단체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또 언제까지 이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려는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예컨대 ‘노면 살얼음(또는 살얼음)’이라 하면 될 것을 ‘블랙 아이스(black ice)’, ‘두 번째 집(또는 제2의 집)’이라 하면 될 것을 ‘세컨드 홈(second home)’, ‘초고난도 문항’이라고 하면 될 것을 ‘킬러 문항(killer question)’이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빈대 공포증’을 ‘빈대 포비아(phobia)’, ‘환급’을 ‘캐시백(cash back)’, ‘경찰에서 피의자의 얼굴을 식별하기 위해서 찍는 사진’을 ‘머그샷(mug shot)’, ‘상대를 보지 않고 하는 악수’를 ‘노룩(no look) 악수’, ‘비용’을 ‘코스트(cost)’, ‘할인(또는 저평가)’을 ‘디스카운트(discount)’, ‘유명인이나 특정 분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나 무리’를 ‘팬덤(fandom)’, ‘눈속임 가격 인상’을 ‘슈링크플레이션(shrink+inflation)’, ‘극도의 정신적 피로나 무기력’을 ‘번아웃(burnout)’,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또는 무마스크)’을 ‘노(no) 마스크’, ‘오류’를 ‘버그(bug)’, ‘세계적 수준의 지방대’를 ‘글로컬(global+local) 대학’, ‘약자(또는 패배자)’를 ‘언더도그(underdog)’, ‘생명을 다루는 의사’를 ‘바이털(vital) 의사’, ‘신속처리안건을’ ‘패스트 트랙(fast track)’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사실(또는 진상)’을 ‘팩트(fact)’, ‘청사진(또는 미래상)’을 ‘로드맵(road map)’, ‘구도(또는 틀)’를 ‘프레임(frame)’, ‘시중(또는 접대)’을 ‘서빙(serving)’, ‘사진 찍기 좋은 곳’을 ‘포토존(photo zone)’, ‘신호(또는 부호)’를 ‘시그널(signal)’, ‘이용권(또는 상품권)’을 ‘바우처(voucher)’, ‘위험’을 ’리스크(risk)‘,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필리버스터(filibuster)’, ‘전망(또는 조망)’을 ‘뷰(view)’, ‘60세 이상 취업자(또는 은퇴 후 일자리를 찾는 노인)’를 ‘워킹 시니어(working senior)’, ‘꿀조언(또는 유용한 정보)’을 ‘꿀 팁(tip)’, ‘인공 지능 기반 첨단 조작 기술(또는 이미지합성기술)’을 ‘딥 페이크(deepfake)’, ‘핵심어(또는 주요어)’를 ‘키 워드(key word)’,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를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 ‘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또는 근무 여건)’을 ‘워라밸(work-life balance)’, ‘심층 학습’을 ‘딥 러닝(deep learning)’, ‘시간 외 대량 매매(또는 기관과 기관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량 매매)’를 ‘블록 딜(block deal)’, ‘화학작용(또는 끌림)’을 ‘케미(chemistry. 줄여서 chemi)’, ‘배제(또는 무시)’를 ‘패싱(passing)’, ‘요리사(또는 주방장)’를 ‘셰프(chef)’, ‘거품’을 ‘버블(bubble)’, ‘세부(細部)’를 ‘디테일(detail)’, ‘정신(력)’을 ‘멘탈(mental)’, ‘경향(또는 추세나 흐름)’을 ‘트렌드(trend)’라고 쓴다.

이처럼 대체할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국어를 예사로 쓰고 있다. 마치 누가 외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지 경연하는 것만 같다. 우리말로 해도 뜻이 통하는데, 굳이 외국어를 쓴다면 이는 ‘언어 사대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외국어를 적당히 사용해야 세련되고 유식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과시나 허세다.

따라서 공공언어는 대다수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써야 한다. 혹 이해를 돕기 위해 외국어를 써야 한다면 우리말을 먼저 쓰고 괄호 안에 외국어를 쓰면 될 것이다.

아무쪼록 관계 당국과 국어 관련 단체들은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외국어 남용을 막고, 쉬운 우리말을 쓰도록 힘써 주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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