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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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언제부턴가 박 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향이 태백이라며 배추 농사
짓는 홀어머니 걱정에 자주 소주 나발을 불던 박 씨

소한(小雪), 노숙에도 룰이 있다 따뜻한 바람 솔솔 나오는 역 대합실 화장실
주변 통로는 대빵들의 차지다 지하도 구석 자리는커녕 텃세에 밀려 수원역으
로 쫓겨 내려간 노숙자는 그날 밤 한 번 더 서럽게 울었으리라
밤새 한파 몰아친 아침이면 대합실 의자에 웅크린 채로 지하도 구석에 엎드
린 채로 가린 한 삶의 끈 붙잡고 복사꽃 흐드러진 고향집 사립문 활짝 열어젖
히는 꿈 깰까 봐 절대로 그들은 서로를 먼저 깨우지 않는다 이따금 구급차가
와서 얼어 죽은 노숙자를 싣고 가는 날이면 기차는 연착을 하곤 했다
재활센터로 들어갔던 몇몇은 일주일 만에 돌아와 강소주를 마셨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철도 공안과 늘 실랑이가 벌어
졌다
광장의 비둘기를 모두 잡아먹어야 이곳을 떠날 수 있으리라

대한(大寒), 용산역에서 전자상가로 가는 굴다리 앞에 노숙자들 긴 줄 서 있
다 용산역 광장 무료급식이라고 쓴 1톤 탑차의 문이 열리자 구수한 된장국 냄
새가 하느님보다 먼저 그들을 싸안는다
역전 시계탑 긴 시침이 막 정오를 알리는 순간 용산역 대합실에 말쑥한 박
씨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탑승구 전광판을 눈부신 듯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감상] 대한이 놀러 왔다가 얼어 죽는다는 소한. 소한이라는 이름은 대한보다는 추위가 약해진다는 의미지만, 우리나라는 소한이 대한보다 더 춥다. 24절기가 중국 황하 유역을 기준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동지, 소한, 대한은 정초한파(正初寒波)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시기다. 인생의 겨울역도 마찬가지다. 춥고 서럽고 막막하다. 하지만 시련과 역경을 감내하는 동안 ‘동발춘행(冬發春行)’ 열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새로운 출발을 알릴 것이다. 올해도 영혼이 한 뼘 자란, 선물꾸러미를 든 말쑥한 당신이 저 멀리 보인다.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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