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박규숙 신작소설집 『어쩔 수 없었다』(강, 2023)를 읽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이 「카페 헤밍웨이」였다. 연전에 작은 동네 카페 하나를 인수해 볼까 했던 적이 있었다.

발레를 정확히 언제부터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신었던 발레 슈즈가 할머니 집 내 방에 걸려 있었다. 바닥이 검고 반들반들한 발레 슈즈는 할머니와 나의 시간을 품고 낡아가는 중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아닌 할머니 손을 잡고 발레학원에 다니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할머니는 레슨이 끝날 때까지 연습실 밖 복도에 오도카니 서 있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근이 집을 나간 뒤로 노트북 부팅이 편치 않았다. 그는 왜 바탕화면에 토슈즈를 띄워놓았던 걸까. 바닷빛 위로 토슈즈가 기지개를 켜면 엄마와 함께 발레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속에서 주눅 들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절도 있는 발레 선생님의 목소리와 엄마들의 잦은 탄성 따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혼자 복도의 창문 너머로 나만 바라보았다. 해져 뚫린 저 토슈즈 구멍으로 지금도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177쪽)

주인공 ‘나’에게 토슈즈는 소외와 실패와 부끄러움의 상징이다. 그녀는 ‘해져 뚫린 저 토슈즈 구멍’으로 자신의 인생을 조망한다. 말하자면 트라우마다. 엄마 없이 자란.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헤어진 전남편 우근은 그 토슈즈를 아내의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아준다. 모르긴 해도(‘나’는 우근이 왜 자기를 떠났는지 모른다) 이 부부는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기보다는 방치하는 관계였을 공산이 크다. 우근은 ‘나’의 깊고 어두운 그늘을 떠나 밝고 따스한 양광(陽光)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을 것이다. 그의 새 여자 ‘자민’을 보면 그런 짐작이 든다. 물론 ‘나’가 쓰는 소설은 그런 내색을 일절 하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 모른척한다.

카페 안 공기와 다르게 화장실은 시원했다. 계단 아래 옹색하게 들어서 있어 천장이 머리에 닿을 것처럼 낮지만 오히려 아늑했다. 카페에서 화장실로 통하는 문을 열면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목재로 치장한 카페 내부보다 시멘트 모르타르 마감이 노출된 화장실 벽은 소박한 안정감을 주었다. (중략) 변기와 세면실로 나누어진 작은 공간이지만 아주 비좁지는 않았다. 세면실 어깨쯤 높이에 폭 좁은 거울을 띠처럼 둘러 붙여놓았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모퉁이에는 스툴을 놔두었다.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거울엔 빈 벽만 비쳤다. 벽처럼 보이는 거울을 바라보다 쪽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채광도 안 되는 작은 창이 머리 위에 나 있을 뿐인데 공기는 항상 시원했다. 그 창을 볼 때마다 낡은 토슈즈의 깊은 구멍이 떠오르곤 했다.(187~188)

‘나’의 그림자(shadow)가 안식처로 여기는 곳이 카페 화장실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 그녀는 거기서 ‘쪽잠’에 든다. 그곳은 결국 또 다른 ‘낡은 토슈즈의 깊은 구멍’이다. 「카페 헤밍웨이」는 카페 주인인 ‘나’, 우근(전남편), 할머니, 냥할머니(가난한 이웃), 왕코(유기견), 자민(우근의 애인), J(우근의 친구) 등의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허깨비거나 허수아비다. 진짜 등장인물은 ‘구멍 난 낡은 토슈즈’와 ‘화장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숨어서 이 모든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인물은 ‘엄마’(mother complex)다…그렇게 요약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참는다. 따뜻하게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한겨울의 양광(陽光) 아래서 작가가 들려주는 친절하고 서늘하고 차분한 ‘그림자 이야기(shadow story)’를 귀담아 듣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카페 헤밍웨이」의 화장실은 한때 내가 인수를 고려했던 ‘카페 로코보코’(내가 인수하면 붙일 이름이었다)의 화장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서 좀 놀랐다. 원래 카페 화장실은 다 그런가(그래야 하는가)? 그런 생각도 얼핏 드는 따듯한 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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