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흑구문학연구서.
시, 소설, 평론, 수필, 영미문학 번역을 아우른 일제강점기 작가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한흑구문학연구서 제2권. 방민호, 박진임, 서주희, 신재기, 김시헌, 김미영, 이희정 등 일곱 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여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다각도로 탐구한다. 일제강점기 ‘한국 영문학’의 개척자로서 한흑구의 문학적 면모와 한국 수필문학의 개척자로서 한흑구의 선구적인 수필론과 수필문학의 특징을 통찰한 글, 미국문학의 영향 가운데 세워진 한흑구 문학의 ‘조선적 정체성’에 관해 탐구하는 글을 만나볼 수 있다.

방민호의 논문 일제강점기 ‘한국 영문학’의 네 가지 형식은 부제로 삼은 ‘최재서·이효석·백석·한흑구’의 한국 영문학에 대한 개척자 내지 선구자로서 그 수용 방식의 차이와 의의를 면밀히 살펴본 글이다. 특히 이 논문은 백석의 키플링 소설 번역을 주시하고 한흑구의 키플링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경청하면서, 흑인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 한흑구의 번역 및 비평 활동을 통해서 간취되는 한흑구 영문학의 특징은 무엇보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작가나 시인, 비평가들과 달리 영문학에 스며들어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전개된 것이라 밝히고 있다.

박진임은 논문 ‘한흑구 창작시와 월트 휘트먼’에서 한흑구 스스로 가장 흠모한 미국 시인이라고 표명한 월트 휘트먼이 그의 창작 시편과 문학정신에 끼친 영향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양자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차이점도 찾아내고 있다. 그 과정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휘트먼의 시집 『풀잎』과 그의 시대 및 미국문학의 전통에 대한 진술은 나라를 잃고 미국에서 고학하는 청년시인 한흑구의 시세계 형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조선문단에 서양문학이 이입된 실태를 서지적으로도 집대성한 영문학자 김병철(1921~2007)의 역저 ‘서양문학이입사연구’를 들춰보면, 1930년대에 영문학을 번역해 조선의 문예지나 신문에 게재한 번역자 성명의 빈도수에서 한흑구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한흑구는 미국흑인 시 번역 부문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등장한다.

서주희의 논문 ‘번역의 유토피아적 장소: 한흑구의 미국흑인 번역시를 중심으로’는 한흑구 문학에 나타난 미국의 모습과 한흑구의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이 논의되면서 남달리 그의 관심이 깊었던 흑인문학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온 사정을 직시하여, 흑인문학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짚어보고 흑인문학과 한흑구 문학 간의 접점과 미끄러진 지점을 밝혀낼 뿐만 아니라, 한흑구 문학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를 집어내고 그의 오역 장면에 돋보기를 올려놓기도 한다. 특히 한흑구가 텍스트로 선택한 ‘뉴 니그로’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고 한흑구가 번역을 통해 포착했던 1920년대~30년대 흑인문학의 실천적 측면과 비평으로써 번역이 갖는 의의를 조명하고 있다.

신재기의 논문 ‘한흑구 수필론 연구’는 제목 그대로 한흑구가 남긴 ‘수필론’을 중심으로 그의 수필관을 분석하면서 한국 수필문학의 개척자·선구자로서 한흑구의 문학사적 업적을 통찰하는 글이다. ‘수필문학소고’(1934)의 김광섭, ‘수필의 문학적 영역’(1939)의 김진섭도 단 한 편의 수필론에 그쳤지만, 한흑구는 1934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수필문학론-Essay연구’를 처음 발표한 후 1948년, 1967년, 1971년, 1975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심화한 수필론을 제출하고, 또한 자신의 수필론을 실제 명품의 시적 수필 창작으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오늘의 문학교육 현장에서 수필을 고착적으로 에세이(중수필)와 미셀러니(경수필)로 양분한 것은 수정돼야 마땅하다며, 한국 근대문학사에 영미의 에세이 개념을 최초로 소개한 한흑구의 견해 그대로 경수필(형식적 수필)과 연수필(비형식적 수필)로 양분하고 이를 통용해야 합당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밝혀준다.

특별히 초대한 김시헌(1925~2014)의 ‘한흑구론: 유화와 같은 수필’은 일찍이 1981년에 발표된 것으로, 한흑구가 자신의 수필론에 따라 창발한 시적 수필을 예리하게 분석한 글인데, 신재기의 논의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선행 연구라 하겠다. 고통은 인간의 성격을 창조한다. 이는 틀림없는 말이다. 장소는 인간의 성격을 창조한다. 이는 더 정확한 말이다. 고통도 장소가 수렴하는 것이다. 한흑구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글쓰기가 그의 삶이 이뤄진 장소를 문학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릇 삶과 문학이 장소를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과연 장소가 한흑구 문학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글들을 그는 남겨두었다.

김미영의 논문 ‘한흑구 문학에 나타난 평양, 미국, 포항의 장소감’은 구조주의적으로 공간과 장소를 분석한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랠프의 ‘장소와 장소상실’, 현상학적이고 인문학적으로 지리를 탐구한 중국계 미국인 인문사회학자 이 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 이들 저서를 이론적 근거로 삼아 한흑구 문학에 서린 평양, 미국, 포항의 장소감을 분석적으로 제출하고 있다. 그의 고향인 평양을 가운데에 놓고 살펴볼 때, 미국에 체류한 청년기 문학의 평양과 포항에 정착한 장년기 문학의 평양은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에서 평양은 그립지만 갈 수 없는 고향으로 피식민지 출신의 고학생 입장에서 잃어버린 고국에 중첩되고, 후자에서 평양은 분단으로 갈 수 없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신 어버이의 이미지에 중첩된다는 것이다.

이희정의 논문 ‘한흑구 문학에 나타난 미국 인식과 조선적 정체성’은 한흑구의 미국 체험이 담겨 있는 소설과 수필, 평론 등 문학 작품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미국 경험과 그것을 통한 자기 인식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한흑구 문학은 일제식민지 당시 미국유학의 경험이 조선인 작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특히 그는 미국을 체험하면서 물질주의의 냉정함을 단지 환멸적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서 미국이 가진 열정을 찾으려 스스로 다지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것을 밝혀내고 있다. 한흑구의 미국유학 체험과 그것을 통해 한흑구가 스스로 인식하게 된 주체성, 생명력, 조선적 태도는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소유의 한 과정이었으며, 소유를 행동으로 연결짓는 듀이의 실용주의를 인식하고 스스로 식민지 조국을 위해 자기의 사상과 문학 활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단 한 편의 친일 문장을 남기지 않는 작가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흑구문학연구서 제2권을 펴내는 후학들 앞에는 몇 가지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총제적으로 조명하지 못한 한흑구 문학을 연구하는 일, 현재까지 발굴한 한흑구 문학을 총정리하여 한흑구문학전집을 펴내는 일, 손바닥의 메모처럼 기억되는 한흑구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전기적 형식으로 정돈하여 단행본으로 내놓는 일, 그리고 한흑구의 시대와 그의 문학을 하나의 장소에 집대성하는 한흑구문학관 건립 등이다. 물론 한흑구 문학의 갈피마다 흑백사진 같은 장면으로 존재하는 그의 삶과 문학과 시대를 영상으로 되살리는 다큐멘터리 제작도 소중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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