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만 4살 아이를 둔 엄마가 찾아왔다. 아들을 꼭 의대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벌써 한글도 가르치고, 유명 영어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특별과외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유치원생과 초등생을 위한 의대 진학 준비 학부모 캠프나 학원 같은 데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엄마를 한참 바라보다가 “내게 사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초등 의대반을 만드는 사람과 그런 곳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 모두 아동 학대죄로 구속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흠칫 몸을 움츠리며 선생님은 좋은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엄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바로 엄마 자신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대 쏠림’의 원인은 무엇인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던 1960~1970년대는 화공학 관련 학과가 합격점이 높았다. 1980년대 명문고 자연계 수석 졸업생 상당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장 선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상위권이 무조건 의대에 가지 않았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엄청나게 많은 회사가 파산했다. 수많은 사람이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었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직장, 철밥통에 관해 생각했다. 공무원, 교사, 자격증을 가진 직종 등에 주목했다. 정치·경제적 외풍에 무관하면서도 고소득이 보장되는 의사를 최고로 꼽았다. ‘의대 쏠림’의 시작 시점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묻지 마 의대 광풍’이 휘몰아쳤다.

과열된 교육열을 악용한 대표적 사례가 예비 의대반이다. 일찍 목표를 정해 어린 시절부터 몰아붙이면 성공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공부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배우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학습 의욕 조기 말살반’일 따름이다. 영국의 독서 연구학자 우샤 고스와미와 그녀의 연구팀은 5세부터 책 읽기를 시킨 아이들이 7세부터 시작한 아이들보다 학업 성취도가 낮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어린아이에게는 문자를 가르치고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 부모가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아이는 ‘정확하고 좋은 글 듣기’를 통해 단어의 결합과 문장 구조, 기능에 관한 통사론적 지식을 터득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시간의식, 역사의식, 자아의식 같은 고등정신 능력도 배양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군고구마를 먹던 겨울밤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는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주기적으로 할머니는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을까를 물었다. 달콤한 고구마 맛을 즐기며 지어낸 이야기를 어눌하게 말하면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 장하다, 어쩜 이리 똑똑하나”라는 즉각적인 감탄의 피드백과 함께 나를 꼭 껴안으며 얼굴을 비비곤 했다. 이야기를 듣거나 구상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어휘력이 향상된다. 문풍지 바르르 떨리는 긴긴 겨울밤과 할머니는 상상력 발전소였다.

엄마나 할머니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통한 정서적 안정감, 놀이를 통한 즐거움, 자연의 경이와 신비의 체험,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 삶을 바라보는 태도, 좋은 습관의 형성 등이 성공의 발판이다. “당신에게는 실로 엄청난 재산이 있을지 몰라. 보석 상자와 황금 궤짝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절대로 나보다 더 부자일 수는 없을 거야. 내게는 책 읽어주시던 어머니가 있었으니” 스트릭랜드 길리언의 ‘책 읽어주는 어머니’의 한 대목이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한다. 인기 직종도 계속 바뀐다. 전공은 나중에 아이 적성에 맞는 것을 택하면 된다.

엄마나 할머니의 품속이 아이의 지적·정서적 성장을 위한 최고의 조기 교육기관이다. 이 겨울이 가기 전 단 하루라도 ‘조부모 방문하여 옛날이야기 들어보기’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싶다. 부모의 양육 방식이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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