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산일기
18세기 퇴계학맥의 학자 제산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의 일기가 번역됐다.

한동대학교 김윤규 교수는 제산 김성탁의 일기인 ‘지비록(知非錄)’과 ‘경신동지일시기(庚申冬至日始記)’를 모두 번역해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제산일기(霽山日記)’로 출판했다고 밝혔다.

김성탁은 적암 김태중(金台重)과 갈암 이현일(李玄逸)에게 배워서 퇴계학맥의 적전을 계승했다. 20대에 향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제산에게 어사 박문수와 감사 조현명 등이 그의 집인 안동 천전리로 방문하고 학문적 질의를 계속하곤 했다. 이들의 추천에 의해 조정에서는 참봉과 현감 등의 벼슬을 내렸고, 1735년에는 문과에 급제해 정언 수찬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남 남인이며 이현일의 제자인 김성탁의 탁월한 능력과 활발한 활동은 영조 초기의 노론정권에게 부담이 됐다. 마침내 노론은 김성탁의 상소문의 문구를 빌미로 가혹하게 국문한 뒤에 1737년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다음 해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진 후 석방되지 않고 1747년 광양에서 별세했다.

제산은 성실한 학자로 생애 내내 일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전하고 있는 것은 ‘지비록’과 ‘경신동지일시기’ 뿐이다.

1732년 기록된 ‘지비록’에는 천연두가 창궐해 마을에 거주하지 못하고 단체로 피신하는 사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거의 매일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소식이 있고, 종종 사망자가 있어서, 당시 전염병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고통받는 상황을 잘 읽을 수 있다. 제산은 그런 속에서도 성실한 학자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매일 독서한 내용을 기록했고 마음에 일어나는 감상을 시로 읊었다.

1740년과 1743년 기록된 ‘경신동지일시기’에는 귀양지인 광양에서 지내고 있는 노학자의 일상이 가감없이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도 가끔 전염병이 돌면서 모든 소식이 끊어지는 때도 있었고, 가뭄이나 수해 등의 천재지변이 겹치기도 했다. 제산은 유배객으로 와 있었지만 이들의 고통을 마음아파 하고, 노비에 이르기까지 염려해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당시 현지의 학자와 학동들은 끊임없이 가르침을 청했다. 남도의 많은 지식인들을 제산과의 교유와 토론을 원했고, 인근의 재주있는 학동들은 제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이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문집을 낸 학자도 많았고, 서원에 배향되는 학자로 대성한 이도 있었다.

이 두 일기는, 조선 후기 남인 선비의 성실한 학문활동과 좌절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교학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유배지에서 베푼 가르침은, 퇴계학맥의 학자가 남명학맥의 선비들을 가르친 드문 예로, 이미 현지에서 ‘지식의 확산’이라는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일기는 조선 후기 유배지식인과 지역문화가 상호 유익한 영향을 주고받은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크다.

이 일기를 번역한 김윤규 교수는 “두 일기 모두 난해한 행초서로 기록됐는데 특히 적거일기는 인쇄된 책력에 덮어 쓴 것이어서, 독해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한 자씩 꼼꼼히 읽어가는 중에 제산선생의 행적과 활동을 알아가는 보람이 매우 컸다. 특별히 전라도 광양에서 교육활동을 한 기록은, 현재까지도 두 지역간의 호의와 상생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산 김성탁의 문집인 ‘제산집’이 현재 번역 중이며 곧 완역될 예정이므로, 모든 기록이 번역되면 당시 지식인의 학문과 저작활동까지 전체적인 면모가 읽기 쉬운 한글로 제공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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