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표지 입체
어린이에게 꿈과 상상력을, 어른에게는 사랑과 동심을 찾아 줄 사막의 우물 같은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어린 왕자’가 지금 새로운 얼굴로 찾아간다.

1943년 책으로 나온 뒤 오늘날까지 어린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큰 사랑을 받으며 성경 다음으로 널리 읽히는, ‘전 세계가 감동한 책’이다.

“10대와 20대에 읽고 30대와 40대, 50대와 60대가 되어 다시 봐도 좋은 책이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삶의 지혜가 마음에 새겨진다”고 입을 모은다.

익히 알다시피 ‘어린 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와 떠돌이별인 소혹성 B-612호에서 지구를 찾아온 어린 왕자가 주인공인 생텍쥐페리의 동화이다.

토박이말까지 헤아리면 450여 개 언어로 번역판이 나왔고,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펴낸 ‘어린 왕자’만 해도 1,000여 종이 훌쩍 넘는다.

‘이러한데도 굳이 어린 왕자를 한 종 더해야 하는가.’ 내내 서슴거렸으며, 실제로 마뜩잖게 여기는 눈길 또한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형편을 잘 알면서, 묵혔던 원고를 새삼스럽게 다시 꺼내어 다듬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오랜 세월 책과 잡지 만드는 일을 해 오며 몸에 밴 직업병에서 비롯한 것으로, ‘어린 왕자’를 읽다가 마주치는 교정·교열 본능이 그 출발이다.

낱말은 물론이고 잘못된 내용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소혹성 숫자와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어린 왕자가 해넘이를 본 횟수 등이 그러한 예이다.

천문학자가 그런 별 중의 하나를 발견하면 이름 대신 번호를 매긴다. 이를테면 ‘떠돌이별 제3251호’처럼 말이다.

“어느 날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도 있어.”

“마흔세 번 본 날 그럼 넌 그렇게도 슬펐던 거야?”

앞쪽 문장에서 밑줄 친 곳은 ‘떠돌이별 제325호’와 ‘마흔네 번’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가 직접 손으로 쓴 원고와 타자기로 옮겨 쳐서 마련한 것 두 가지인데, 서로 다른 원본 영어와 프랑스어을 바탕으로 출판한 책을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물론 이를 바로잡지 않더라도 독해와 감상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어른들은 나더러 속이 보이건 안 보이건 간에 보아구렁이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차라리 지리, 역사, 산수, 문법이나 열심히 공부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해 주었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1995년부터 ‘산수’가 ‘수학’으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산수’로 표기하는 것도 문제이다.

더욱이 일곱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얼굴이 뻘건 아저씨사업가를 가리키는 ‘버섯’은 다르게 번역하지 않으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얼굴이 검붉은 한 신사가 사는 별을 알고 있어. 그는 한 번도 꽃향기를 마셔 본 일도 없고, 별을 쳐다본 적도 없어. 그러고 누구를 사랑해 본 일도 없이, 오로지 계산만 하면서 살아왔어. 그러면서도 그는 하루 내내 아저씨처럼 ‘나는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주 중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만 되뇌이며 우쭐거리지.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버섯이라고!”“뭐라고?”“버섯이라니까!”

이 대목을 읽으면서, 밑줄 친 버섯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얼굴이 뻘건 아저씨사업가를 가리키는 건 분명하지만, 그 뜻은 곧바로 다가오지 않는다. 외국에서 펴낸 ‘어린 왕자’를 찾아보면 프랑스 champignon, 영국 mushroom, 일본 キノコ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두 다 ‘버섯’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펴낸 어린 왕자에도 하나같이 ‘버섯’으로 나와 있다. 문제는 ‘버섯’으로 번역한 이 대목을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데 있다.

편집자이기도 했던 강용규 동화작가는 이 부분은 오역(誤譯)이라면서 “그는 사람도 아냐, 그저 벼락부자를 꿈꾸는 몽상가일 뿐이야!”로 바꾸어 번역·출간한 바 있다.

“누구를 사랑해 본 일도 없이, 오로지 계산만 하며 살면서도 하루 내내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만 되뇌이며 우쭐”거리는 장사꾼을 가리키는 만큼, 적어도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야, 독버섯이야!”라고 옮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버섯이라면 프랑스 champignonveneneux, 영어 poisonous mushroom, 일본어 毒茸여야 한다.

오랫동안 더듬거리며 헤맨 끝에, 마침내 답을 찾았다.

;어린 왕자를 집필하던 당시에는 ‘버섯’을 ‘나무에 빌붙어 영양분을 빨아먹는 기생 식물인 곰팡이’로 여긴 까닭에 먹지 않았단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사업가는 사람이 아니야. 기생 버섯 어린왕자 를 집필하던 당시에는‘버섯’을‘나무에 빌붙어 영양분을 빨아 먹는 기생 식물인 곰팡이’로 생각한 까닭에 먹지 않았답니다.이지.”

어린 왕자를 ‘철학 동화’나 ‘어른을 위한 동화’로 자리매김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그런지, 그 대상 독자가 어린이인지 어른인지에 대한 관점 또한 따져 봐야 한다고 본다.

결론을 먼저 밝히면 어린 왕자는 명백하게 동화이다. 다음 일화를 놓고 보면 그 근거로 충분할 듯 하다.

생텍쥐페리가 1942년 뉴욕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한 소년의 그림을 냅킨에다 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이처럼 생긴 어린아이가 살고 있어요.”

그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출판업자 커티스 히치콕이 무릎을 쳤다.

“생텍스, 이 아이를 주인공으로 어린이책을 만들어 봅시다. 크리스마스에 맞춰 책을 내면, 어린이들에게 참으로 근사한 선물이 될 거예요.”

그런데도 “이야기 속에 감춰진 깊은 뜻과 진실을 어린이 독자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 거.”라면서 ‘동화로 쓰인 철학책’ 또는 ‘어른을 위한 동화’로 규정짓는 경우가 적지 않는다. 하지만 이로써 어린이 독자에게 어린 왕자와 거리를 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감상에서 일어나는 감동이 우선해야 하는 예술이므로, 의미를 앞세워 규정하는 철학 쪽으로 그 비중이 기울어서는 곤란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설혹 ‘이야기 속에 감춰진 깊은 뜻과 진실’을 어린이가 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른과 얼마쯤 다르게 받아들일지라도 동화로서 어린 왕자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를 나이 차이에서 오는 대립이 아니라 동심을 바탕으로 한 감수성과 상상력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으로 봐야 하는 까닭이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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