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은 산업일꾼들이다.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산업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피땀으로 대한민국 천지가 개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근저에 전사를 키우고 기술력을 공급한 대한민국의 대학이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 그런 대학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최근 모 지방국립대 교수의 범행(?)을 다룬 기사가 그 방증이다. 죄목은 사기이고, 형량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해당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연구과제 사업을 진행하면서 필요한 장비구입에 연구비를 전용하였다. 총 31회에 걸쳐 소액의 소모성 연구재료비를 청구하여 8천여 만원을 모았고, 3000만∼5000만 원 대의 연구 장비 3대를 구매했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그가 산학협력단을 속이고, 연구재료비 명목으로 사기를 치고, 연구원들의 식비 명목으로 100만 원을 챙겼다고 단죄했다. 대학가에서는 아주 익숙하고 반복되는 스토리이다. 얼핏 보면 해당 교수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 같지만 실상은 복사비와 재료비, 식비를 아껴서 연구장비를 구입한 것이 전부다. 물론 연구비사용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장비를 사전 허락이나 서류도 갖추지 않고 구매한 교수의 조치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수개인이 연구비를 유용한 것도 아니고, 장비를 독점하거나 사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닌데 사기범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보면 진급을 위해 논문을 준비하는 부교수이고, 석박사과정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에 매진하는 전형적인 교수의 한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낙인찍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대한민국의 진면목이다.

평범한 국립대 교수를 범죄자로 전락시킨 원흉은 ‘연구자들에 대한 천시와 연구비 부족’이다. 기술력과 인적자원만이 살길이라는 국가적 공감대는 말뿐인 허울이다. 2024년 정부는 연구·개발(R&D) 예산을 5.2조 원(16.6%) 삭감했다. 그 때문에 대학실험실 박사 후 연구원들의 권고사직이 이어지고 남은 연구원들도 급여가 줄어 밥 대신 컵라면을 먹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신규 과제 축소와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 연구비도 삭감되면서 바이오, 반도체, 항공우주, 인공지능, 로봇공학 분야까지 첨단기술분야 연구체제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국가 연구개발(R&D)사업에 참여하는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매월 일정 수준의 ‘연구생활장학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모든 전일제 이공계 대학원생들에게 석사는 매월 최소 80만 원, 박사는 매월 최소 110만 원을 빠짐없이 지원하겠다고도 했지만 조삼모사(朝三暮四),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사탕발림이다. 대학 연구실에서 일하는 대학원생은 대학을 졸업한 일반인과 같다. 당장 먹고 살 생활비도 필요하고 품위유지비도 필요하다. 석사 80만 원, 박사 110만 원은 최저임금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또래 대기업 신입사원 초봉이 4000~5000만 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속된 말로 껌값이다. 대학가에 의대 쏠림과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고 그 결과가 사회적 문제로 폭발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영국의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 고등교육(THE)’이 발표한 ‘개교 50년 이하 세계신흥대학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싱가포르의 난양공대(NTU) 호텍화(Ho Teck Hua) 총장의 소회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수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가 만들어준 결과”이며,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려면 “경제적 보상, 세계적인 연구시설, 서로 경쟁하며 협력하는 연구문화라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난양공대의 경우 우수한 연구자를 확보하려고 총장 포스닥 펠로십을 운영하여 포스닥 연구원에게 연봉을 8만 싱가포르달러(약 8000만 원)씩 제공하고, 첫해에는 10만 싱가포르달러(9900만 원)의 별도 연구비를 지원한다. 프로그램 실시 이후 우수논문이 급증했고 인재유출도 없었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교수진은 한 명도 홍콩이나 중국의 유혹에 부응하지 않고 대학 연구실을 지켰다. 대학이 나라를 지키고 또 살린 셈이다.

애써 연구비를 수주해도 간접비로 30% 이상 떼이고, 회계나 서류를 처리하느라 연구는 뒷전이 되는 우리 대학의 현실을 비교하면 부러운 일이다. 글로컬30, 라이즈사업, 대학혁신사업에 지방대학들이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다. 대학이 살려면 연구실이 살아야 하고, 연구실을 살리려면 연구비의 중앙집중화 상황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연구만 할 수 있는 대학 연구실, 대학과 지역 그리고 대한민국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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