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영 목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고전문학 박사
강지영 목포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고전문학 박사

청년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회빙환’이라는 단어가 있다. 회귀, 빙의, 환생을 주제로 하는 웹툰이나 웹소설 등의 작품을 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회빙환’ 작품은 한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전 같지는 않으나 지금도 그 인기는 시들지 않고 있다. 소재가 재미있어서인지 뻔한 결말로 인해 웬만큼 이색적인 내용이 아닌 이상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도 받고는 있음에도 시간을 넘나들고 몸이 바뀌고 다시 태어나는 장치를 가운데 둔 ‘회빙환’은 여전히 청년들이 즐겨 찾는 콘텐츠의 중심에 놓여 있다.

결말을 예상할 수 없는 게 아닌데도 왜 ‘회빙환’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이목을 끄는 걸까? 세 주제어에는 현실을 벗어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하여도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으나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 작품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데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게 청년들이 ‘회빙환’ 작품을 즐겨 읽는 이유였다. 이는 곧 현실이 그만큼 불만족스럽다는 것일 텐데 그렇게 보면 ‘회빙환’이라는 소재는 그러한 그들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꽤 매력적인 소재임은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을 넘어서고 죽은 이가 되살아난다는 점에서 ‘회빙환’은 일종의 도술이다. 도술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는 한국 고전 작품 중 <전우치전>이라고 있다. 전우치는 구름을 타는가 하면 독수리 등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벼락을 부릴 줄도 아는 기이한 인물이다. <전우치전>은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전우치가 백성들의 궁핍한 처지를 보다 못해 천상 선관으로 변신해 임금에게서 황금 들보를 받고 그것으로 백성들의 궁핍을 해결해준다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한다. 이 작품은 약자를 도와주러 나서는 영웅적 면모로 인해 ‘홍길동전’과 자주 비교되고는 한다. 하지만 전우치는 아녀자를 훼절시키려 하는가 하면 도술을 명분 없이 사용하기도 해서 온전한 의인으로만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당대에 꽤 인기를 끌었는데 서사가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도술이라는 판타지적 장치와 응징을 연결해 향유층의 갈증을 해갈해 주고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에서의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여 그것이 문학의 효용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카타르시스를 비극에 한정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느끼는 모든 감정의 정화, 등장인물에의 동일시와 투사를 통한 감정의 해소에까지 적용해 본다면, 아녀자를 겁탈하고 명분 없이 도술을 쓰는 등 영웅적 면모와는 거리가 먼 전우치를 주요 등장인물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당대에 인기를 끈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전우치의 응징에서 향유층이 통쾌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회귀, 빙의, 환생을 통해 오늘날 우리네 청년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화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회빙환’ 작품의 유행과 더불어 청년들이 자주 소환하는 단어가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틀을 의미하는 ‘클리셰(Cliche)’다. 그들은 ‘회빙한’의 뻔한 구조를 과도한 클리셰의 사용으로 표현한다. ‘클리셰 범벅’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비슷한 내용의 새로운 작품을 끝없이 읽어댄다. 그들이 그만큼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작품에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이 틀어지지 않는, 빵틀처럼 짜여 있는 듯한 ‘회빙환’ 작품의 유행은 어쩌면 현실에 맞서 싸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그러하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음을 서둘러 받아들인 청년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쉼 없이 자신을 증명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 사회가 제공한다는 기회가 역으로 끝없이 자신의 리셋(reset)을 희망하지만 끝내 리셋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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