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본다.

<감상> 흑백사진처럼 떠오르는 60년대 이전의 가난한 농촌의 모습이다. 가을에 거둔 곡식은 겨울을 나면서 바닥이 나고, 봄날엔 푸성귀와 희멀건 죽을 끓여먹다가 그것도 떨어져 막막한 때가 보리고개다. 하지가 가까워 오면서 굶주린 이들은 목숨마져 흔들리는데, 하루해는 길기도 길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보리밭 풋보리에는 아직도 뿌연 물만 날 무렵 가난한 이들은 죽음보다 무거운 목숨만 남아 얼굴빛은 핏기를 잃거나 누렇게 부황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밥을 해야할 솥에 아무 것도 끓여 먹을 것이 없어 굶으며 사흘간 사용하지 않은 무쇠솥은 벌써 녹이 슬었다. 그 무렵 감꽃이 말없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그것을 주워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하다가 혹시 솥에 음식이 들었나하고 몰래 솥을 열어본 것이다.

(조주환, 시인, 한국문인협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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