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 과거·현재·미래 잇는 가교

페리칸은 새끼들에게 먹일 것이 없으면 자기 창자를 꺼내 먹인다. 물고기 중에는 부화한 치어들이 성어가 될 때까지 어미 몸을 뜯어먹고 자라는 종류도 있다. 비록 미물이지만 이 새와 물고기들의 눈물겨운 모성애를 발견한다.
일제 치하인 1917년 경 강원도 산골 화전민들이 살던 오지에 폭설이 내려 그 이듬해 봄까지 교통이 두절되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변을 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실태조사 보고서에 감동적인 장면을 만나게 된다.
어느 외딴집 너댓명의 가족이 고스란히 아사했는데 그집 천장에 메달린 종이 봉지에는 하얀 쌀이 두어되 가량 남아 있었다. 부모님 제사에 진메 지을 쌀이었기 때문이다
그 산골의 화전민들이 유식한 유학을 배웠을 리 없고 보면 우리들의 극진한 효 사상은 유교문화 이전의 고유관습이라 할 수 있다.
배우지 못한 천민이 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생시에 무척 좋아하신 개고기를 장만하여 제사상 밑에 놓고 절을 했다는 이야기나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온 가족이 계속 절을 하는 이상한 제사를 본 양반이 까닭을 묻자. 양반이야 유식해서 귀신이 언제 왔다 가는지 알지만 우리네 같은 까막눈이야 알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밤새도록 절을 하다보면 그 중에 한번은 우리 아버지가 절을 받을 것 아니냐는 어림짐작에서다. 조상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효’는 다반사에 해당하는 원형적인 특질이다. 과거에의 회귀가 아니라 과거까지도 현재와 통합하려는 기질이 강하며 시간을 구별하여 쪼개지 않고 둥근 원 속의 한 점으로 봉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패륜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구출될 때 신은 그들에게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문을 한다. 희랍신화에서도 오르페우스는 명부에서 아내를 구출할 때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문을 듣는다. 또한 아라비안 나이트에도 비만과 파베츠왕자가 말하는 새를 구하러 갈 때 노인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일이 틀어지고 검은 돌이 되어 버렸다. 서구인들이 집착하는 현세적인 미덕관이다.
서구인들이 죽음을 “pass by”로 보아 이미 흘러가버린 사람, 단절된 시간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인들이 죽음을 “돌아가가셨다”로 보는 시각과는 많은 차이 있다. 시간관념을 직선적 사고로 보는 서구인에 반해 동양인들은 원형적인 감각으로 시간을 돌고 도는 ‘윤회의 바퀴 살’로 본다.
과거는 흘러버린 물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출렁이는 인연의 포말로 보았다. 같은 유교문화권속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라진 제사를 우리들이 고집하는 이유일 것이다. 서구인들이 분석적인 시각을 가졌다면 우리들은 통시적인 사고체계를 지닌다. 따라서 죽음을 현세와의 단절로 인정하지 않는 바탕에는 ‘인과응보’라는 알레고리를 깔고 있는 것이다.
퇴계 탄신 500주년을 기리는 ‘세계유교문화축제’가 10월 5일부터 31까지 안동 일원에서 ‘새 천년, 퇴계와의 대화’라는 주제로 선생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한다
미국, 영국, 러시아 등 많은 선진국들의 대학에서 퇴계연구소를 개설하고 유명 교수들이 성학십도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한다. 유학을 ‘다 건져먹은 김치독’ 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신선한 대목이다. 우리들이 팽개쳐 놓은 퇴계를 그들이 그토록 숭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이 궁리 해야할 ‘화두’이다.
일년에 단 한번 이 묘지가 꽃밭이 되는 날/ 죽음을 감추고 부풀어 오른 여인의 유방처럼/ 술과 하늘과 눈물에 취해서 한껏 어지러운 슬픈 사랑/으로 시인이 노래한 ‘한가위’가 다가왔다.
수 천년동안 이 명절을 공경해온 독특한 민족성에서 세계 경쟁력을 가질 우리 문화의 에센스를 찾아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