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그림 가치 측정 기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 단편 작가에게 ‘멘슈라 조일리’라는 작품이 있다. MENSURA ZOILI는 ‘ZOILI공화국의 자’라는 뜻의 라틴어라 한다.
ZOILI공화국은 놀랍게도 고도의 문명국으로, 최근에는 ‘멘슈라 조일리’라는 가치 측정기가 만들어져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측정기는 작품이나 그림을 거기에 올리기만 하면 바로 그 가치가 수치로 나타나는 멋진 발명품이다. 배를 타고 ZOILI공화국으로 가고 있는 ‘나’는, 앞에 앉아 ZOILI일보를 읽고 있는 어떤 남자에게, ‘나’의 친구 구메 마사오의 “은화”와 ‘나’의 “담뱃대”라는 작품의 점수를 묻자, 남자는 점수가 매우 낮게 매겨져 있다고 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최고 가치의 걸작으로 측정되어 있는 작품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라고 한다. ZOILI공화국에서는 이 기계를 오직 외국에서 수입하는 예술 작품에 사용하고 자국의 작품에는 사용할 수 없도록 법률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바보라고 느꼈다. 그 때 배에 무언가 부딪히는 큰 소음으로 ‘나’는 낮잠을 깼다는 내용의 단편 작품이다.
이 세상에 가치 판단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가치 판단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사람들마다 가치의 경중이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가치 판단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무언가 절대적 가치를 찾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 보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한 점을 달라. 그러면 내가 이 지구를 움직이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위 ‘아르키메데스의 포인트’다. 절대적인 가치를 희구하는 옛 철학자의 말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다.
최근 숭실대학교에서 제8회 ‘동북아세아기독작가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는 1987년 일본 동경에서 처음 열려, 한국·일본·대만 세 나라 작가들과 문학관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각국의 기독교 문학인들의 업적에 대한 해석과 평가 작업을 시도해 보고, 회원 상호간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는 모임으로, 지금은 타계하였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도 처음 이 회의에 참석한 회원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니노베 겐이라는 일본 시인이 ‘윤혜승의 시 세계’라는 제목으로 윤혜승 시인의 시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 통역을 부탁 받았기 때문이다. 니노베 시인은 윤혜승의 시를 평가하여 ‘기대의 깊이’이며, ‘유대에의 희구, 뜨거운 바람<’이라고 했다.
윤혜승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는 시인은 아니다. 내가 아는 바라고는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이사를 지냈고, 얼마 전에 타계했고, 문인이라는 이야기를 잠깐 들은 것 외에는 잘 모른다. 그런 시인이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알려져 그들이 그들의 말로 번역하고 비평한다는 데 대해 나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나의 시에 대한 무지에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고장이 나은 시인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니노베 시인은 어떤 경로로 이 시인을 알게되었고, 어떻게 번역하였으며, 비평을 할 수 있었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혜승의 시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우리의 좀 독특한 현실이라서,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윤혜승의 시를 ‘멘슈라 조일리’I에나 넣어 보면 수치가 얼마로 나올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니, 이미 ‘멘슈라 조일리’에 올려졌다. MENSURA NIINOBE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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