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문젠도 개고기 먹고 생활

이 겨울엔 연일 ‘브리짓드와 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개는 인육(人肉)과 유사한 육질 때문에 소화 흡수가 잘 된다는 점과 정력에 좋다하여 정력흑탐국민들이 많은 한국에서 특히 수난을 당하는 편임은 사실이다.
흔히들 개는 천리 밖 먼 곳에서도 특별한 후각으로 주인집을 되찾아간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주인의 텔레파시를 감지하여 찾아간다는 설도 있다. 유독 개가 발산하는 뇌파의 사이클이 사람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의견(義犬)이 종종 화제에 오르는 걸 보면 인간과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잘되는 별난 동물임은 분명하다.
한 중견 목사는 개를 성도덕이 문란하며 양보심이 적은 비도덕적 동물이며, 주인을 따르는 충성심을 빼고 나면 비난받을게 더 많은 동물이라며 개를 닮지 말라는 설교를 하고 있다.
개를 키우는 목적은 방범과 애완이 주였는데 보신 목적으로 요즘 폭증하는 수요에 따라 새 소득원이 되자 축산의 반열에 오르내리면서 문제가 제기된 셈이다.
동물애호가들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렇다고 개들이 이 세상에 온통 득실거리는 것을 서구인들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적당 수가 태어나고 죽어 가는 합리적인 먹이사슬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래서 미국만 하더라도 연간 수천만 마리씩 포획하여 사료로 하고 있다지 않던가.
영국인 스콧은 남극 극지를 탐험하고서도 기아로 죽어갔지만 개썰매를 이용한 아문젠은 극지를 돌아 귀환을 한다. 배고플 때 썰매 개를 하나 둘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개고기로 연명하며 돌아온 아문젠을 성공자로 떠받드는 서구세계다.
문제는 그 인정 넘치는 개를 소나 돼지 기르듯 하다가 잔인하게 도살하는 기업적 행위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똥개 한 두어 마리씩 기르다가 돈도 아쉽고 늘어나는 개체를 감당할 수 없어 내어다 판 것을 삼복 때 몸보신한다며 잡아먹는 것은 몰라도 이것이 큰 돈이 된다며 떼거리로 가두어 기르고 있는 행태는 아무래도 험잡힐만 하다 하겠다.
개들이 인간에 대한 배신감으로 원한이 사무치리라는 정서상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엄청난 소음공해요 그네들의 텔레파시가 자칫 인간들의 삶의 질에 저해를 끼칠까 두려운 것이다.
브리짓드 같은 여우(女優)의 독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품격 높은 국민으로 승격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도 새벽잠을 설쳤다. 이웃에서 개 사육을 한답시고 수 십마리를 기르기 시작한 이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떼거리로 울부짖는 괴성에 놀라 소름이 끼칠 때가 비일비재다. 여럿이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는 아비규환 바로 그것이다. 마당에 나서면 맑은 바람소리와 옥을 굴리듯 하는 새소리에 이것 저것 푸대접받는 농업인의 서러움이 사그라지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천혜(天惠) 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개장사를 해야 하는 그 자의 심정인들 어떠할까 싶어서, 그저 어서어서 잘되어서 그런 일 하지 않고도 잘 살게 되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다.
좌우지간 보신탕을 시도 때도 없이 즐기는 점이며 대량 사육하는 것은 한번쯤 심사숙고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개고기를 많이 먹으면 과연 성생활이 월등해진단 말인가?
지나침은 모자람 보다 못하다 했다. 이제는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국민의 시대를 꿈꿔 볼만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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