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갈등과 싸움에 익숙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온 세상을 가장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역시 9월 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의 중계를 보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 한 두 사람만이 아니고 전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그런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워낙 커서 너나 할 것 없이 관심을 가졌지만, 우리 주위에는 작고 개인에게 한정된 이런 사건이 부지기수다. 즉 나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이 서로 상반되어 때로는 논리의 싸움으로 때로는 우격다짐으로 마음과 몸이 상한 일이 지난해만도 어디 한두 가지였겠는가. 정초에는 새해가 평화로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하였건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작게는 우리 주위에, 크게는 세계적으로 이런 갈등은 왜 끊임없이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구약성서’의 모두에는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물을 드리는데, 아벨의 제물이 신께 받아들여진 데 앙심을 품은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살해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마도 인간은 예로부터 갈등을 만들고 싸움을 즐기는 이상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테러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 가능하겠지만, 그 중 하나는 종교적 갈등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다. 본래 종교는 다른 종교를 악마로 배척하기 때문에 종교로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이름만 종교이지 실제로는 종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가 배타적이라 할지라도 진정 해결점은 없는 것일까. 또 그와 비슷한 경우로 우리들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갈등과 싸움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은 그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이다. 인간을 흔히 사회적인 존재라고 하기도 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고 하기도 하고, 언어를 가진 존재라고 하기도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역시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만이 ‘상상력’에 의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 가끔 인간은 출구 없는 방에 갇힌 존재로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상상력’에 의해 자신을 구제하는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일어나는 종교적 문제의 소지는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로 갈등과 싸움을 일으킬 실마리를 타인에게 부여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상상력’의 고갈이 있고 건강하지 못한 의식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도그마를 굳게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타인에게도 강요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도그마나 믿는 바에는 ‘상상력’이 조금도 들어갈 틈이 없고 작용할 여유도 없다.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혹 불교든 최초 종교로서 성립하기 이전에 예수나 마호메트나 석가가 행한 언행에는 그 분들의 탁월한 ‘상상력’이 넘쳐흘렀지만 세월이 지나 그분들의 ‘상상력’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직 형해화된 도그마만 남았을 때, 거기에는 이미 싱싱함과 푸근함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은 사라지고 오직 고리타분함과 갈등과 싸움이 남아 있을 뿐이다.
종교적인 일이 아닌 우리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일에라도 거기에 ‘상상력’이 작용할 때, 우리는 매사를 보다 부드럽고, 여유 있고, 그리고 촉촉함을 가지고 대할 수 있다. ‘상상력’의 최선의 표현은 초월과 관조다. 새해에는 작은 일 그 자체에만 집착하는 속 좁음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상상력’의 힘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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