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녹차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그렇다고 다도를 따라 마시는 것은 아니다. 그냥 녹차만이 가지고 있는 향기와 입안에 오래토록 머물러 있는 맛 때문이다.
차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차학(茶學)의 이론을 정립했던 조선시대의 초의라는 선사는 그의 차시<동다송>에서 “차는 혼자 마셔야 가장 잘 마시는 것이고, 둘이서 마시면 그 다음, 여러 사람이 마시면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 나는 녹차 예찬론자는 아닌데도 녹차는 여러 사람이 함께 마시는 것보다 혼자 마시는 것이 훨씬 맛이 오래 간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주로 녹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회자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내가 차를 마시고, 나중에는 차가 나를 마신다.> 그리고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도 있단다. 차를 마시는 것과 깨달음이 같다는 말인 것 같다.
차를 마실 때마다 나는 차 마심과 독서 행위가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구태여 다도를 말하지 않더라도 독서를 하기위해서는 읽을 책을 준비해야 한다.
책을 준비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책 속으로 달려가 있다. 정성스럽게 책 표지를 만져보면서 속살을 펼친다. 이 때의 흥분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녹차를 끊일 때도 그렇다. 물을 먼저 끓인다. 그리고 차를 우려낼 물 온도를 조절할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은 침이 마를 정도로 흥분되고 긴장되는 시간이다.
기다리는 그 시간에 차 맛이 이미 입안에 가득 머금어진다. 마시지 않았음에도 이미 차를 마신 것 같은 느낌. 독서도 그렇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미 책은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가슴의 설레임과 흥분이 교차된다.
뿐만 아니다. 차는 혼자 마실 때 가장 그 맛이 오래 간다. 독서도 혼자 하는 행위이다. 물론 그룹 독서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의 행위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독서는 언제까지 책과 독자인 나와의 1:1의 만남이다.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 혼자됨의 기분은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한 잔의 차가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은 여유로움이다. 독서도 혼자서 할 때 가장 편한 법이다. 그리고 여유롭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 분주하면 차 맛을 잃어버린다. 독서도 그렇다. 분주하면 독서의 맛을 잃어버린다. 마치 분위기를 모르고 마시는 차 맛이 떫뜨름 하듯이, 독서도 분위기를 놓쳐 버리면 지루하기만 하다. 차도 독서도 분위기를 타는 데는 명수들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한 번 우려낸 차 맛보다, 두 번째 세 번째 우련 낸 차 맛이 훨씬 부드럽고 향긋하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 독서도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읽을 때 그 내용의 맛이 깊게 전해온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읽었고 넘어가 버렸던 내용들이 두 번째 읽을 때는 그 맛이 책 행간마다 묻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독서의 맛이다. 책도 우려내면서 읽어야 한다. 우려낼수록 더 책 향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실 때는 품위가 있으면 더 매력적이다. 아니 품위를 만들어 가면서 마시면 그 향 맛은 더 깊게 전해온다. 차는 커피처럼 아무 곳에서나 훌쩍거리면서 마시면 그 진미를 놓칠 수 있다. 그렇다고 커피를 경망스럽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도 그렇다. 독서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독서의 환경이나 방법의 문제다.
독서를 할 때는 주변 환경정리와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독서 분위기를 잘 연출해야 하는데 그럴 때 독서행위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나 정보의 질은 독자의 가슴 속에 농축되어 저장 될 것이다.
녹차 한 잔 마시면서 책 한 권 읽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면 이 가을이 더 의미 있게 가슴속에 찾아들지 않을까?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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