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냄비가 여러 개 있다. 그 중에 으뜸은 단연 양은 냄비다. 우선 가벼워서 좋고 무쇠 솥처럼 물을 끓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서 좋다. 남들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다고 흠을 잡지만 나는 양은 냄비가 좋다. 양은냄비에는 서민적인 맛이 배어있다. 억눌러지고 찌그러진 우리네 삶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같이 우그러질 줄도 알고 찌그러질 줄도 아는 그 속성이 좋다.

월드컵 열기 때문에 온 나라에 있는 냄비란 냄비가 다 들썩거렸다. 쉽게 열 받고 끓어오를 줄 아는 냄비가 그 근성을 제대로 발휘했다. 독일제, 프랑스제, 일제 냄비가 부럽지 않았다. 그 어디에 내놓아도 무색하지 않을 우리나라 냄비가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미지근한 것보다는 화끈하게 달아오를 줄 아는 그 냄비근성에서 나는 사람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축구공 하나가 유월의 태양처럼 작열할 때마다 모든 사람이 태양에 귀의하듯 한 마음이 되어 뜨겁게 환호했다. 지루한 생, 삶의 분출구를 찾아 열광하며 ‘대~한민국!’ 이라 외치며 엇박자를 두드리는 그 함성이 생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밤잠을 설쳐가며 다들 뜨겁게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도 알고 있다.

돌아보면 그간 얼마나 목말랐고 답답했던 일상이었던가? 7일간의 사랑이었건 보름간의 사랑이었건 모처럼 살맛나는 순간이었다. 나머지 생이 지루할 지라도 당분간은 우려먹기에 좋을 추억거리가 생긴 셈이다.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는 듯 목청껏 소리치며 박수를 치며 열광했다. 온 몸을 던져 응원하는 모습이 때론 살아남고 싶다고 발버둥치는 듯 하였고 때론 절규하는 듯 가슴이 찡했다. 축구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했던 우리의 꿈은 이제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졌다. 우리네 사는 모습도 8강이나 4강으로 진출하는 꿈을 꾸며 생활 전선에서 다시 뛰고 있다. 반칙이 얼마나 꼴불견인지도 보았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스포츠를 통해서 느꼈다. 꿈꾼다고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우연에 기댈 때도 많았다는 것을 시인한다.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스포츠 정신에 빛나는 투혼을 보았고, 승부세계의 냉혹함도 읽었다. 부당한 결과에 때론 승복하며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도 뒤따른다는 현실도 받아들였다. 승패를 판가름한 그 모든 것이 경기 종료와 함께 막을 내렸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내려온 뒤에도 경기는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 외치던 구호 소리를 떠올리면 나도 몰래 힘이 솟는다. 어딘가 몰입하고 전부를 걸 수 있는 젊음과 그 에너지가 일파만파로 번져 무거운 일상생활의 수레바퀴에 가속이 붙을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친 승부집착과 아전인수식 해석은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군집했다 흩어진 뒷자리에 난무하는 쓰레기도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이제 ‘붉은 악마’는 ‘대한민국’표 라벨을 붙여도 좋을 만큼 응원문화로 자리 잡았다. 무리 속에 소속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한 결과일 것이다.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이성을 잃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길거리 문화로 자리 매김하게 될 것이다.

냄비 근성이 우리 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 비춰지기도 했지만, 그 밑바닥엔 장작불로 달구던 무쇠 솥 같은 투박한 근성이 있다. 압력솥과 뚝배기와 냄비 중에 응원용은 뭐니 뭐니 해도 냄비다. 적당히 불기를 조절해 가며 용도에 따라 꺼내 쓴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끓고 있는 가슴이 분출구를 찾아 열기를 발산하였고, 그런 몰입의 경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면 그로서 족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달아오르는 사람도 위험하지만 아무리 불을 지펴도 반응이 없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냄비라고 부르는 우리 집 냄비가 좋다. 고상함이나 품격은 좀 떨어지지만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고 낡아서 편안한 경지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싫고 좋음이 분명하여 까다로운 듯하지만 보호막만 벗겨내지 않는다면 쌓인 정 때문에라도 오래 애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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