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마무리를 위하여 분주하던 지난 세밑 조용하게 치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이 있었다. 다름 아닌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재단 설립을 위한 자리였다.
우송 김학봉(초대∼2대 대구시의원·89) 선생이 평생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고도 모자라 소년소녀 가장 및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지속적인 지원으로 돌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사재 50억원을 털어 복지재단(우송)을 설립하고 운영의 기반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선뜻 결정하기 어렵고 나서기 어려운 일을 기꺼이 마다 않는 정신, 희생과 봉사로 채워오신 삶이기에 더욱 빛나는 자리였다.
가끔씩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독지가의 쾌척이 우리의 심금을 울려 왔지만 이번에는 남달랐다. 지금까지 거액의 기부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삵 바느질 할머니, 행상아주머니, 국밥장수 등 어려운 분들이었다. 물론 언론이 이들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킨 면도 있지만 어쨌든 들어 나는 것만으로 보면 우리사회의 기부문화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이 주로 해온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돈을 버는 데만 급급했지 쓰는 방법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라고 본다.
해마다 연말이되면 각종 모금 행사가 홍수를 이룬다. 지난 세 밑도 예외는 아니었다. 곳곳에서 불우한 이웃들과 온정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수 십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100만원자리 돈 다발을 넣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도 어김없이 등장하였고 무명으로 거액을 희사하신 분도 있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기부문화의 후진국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불우한 이웃들이나 후학들에게 나누는 풍토가 척박하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명문대학의 후원금 모금이나 거대방송사가 주최하는 불우이웃 돕기 행사에서는 많이 몰리지만 정작 작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 비영리 사회복지시설이나 소외계층에 대해서는 찬바람이 나라만큼 실적이 저조하다고 한다. 방송사의 불우이웃 돕기 모금에는 엄청난 성금이 쌓이는데서 보듯 우리의 기부 문화는 경제적 여유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하겠지만 개중에는 얼굴 알리기 성격의 성금도 적잖았다고 보여진다.
우리나라가 빈곤한국에서는 벗어났지만 기부에서는 여전히 빈곤이다. 사회환원에 대한 고민은 커녕 전재산을 그대로 자식에게 대물림 해주려는 재력가가 많고 일부 기업인은 법망을 교묘히 피해 불법 상속을 꾀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실제로 이러한 문제로 지탄을 받고 있는 대기업인도 있다.
문제는 IMF경제위기 이후 반부격차에 따라 기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늘진곳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노령 인구와 가족해체의 급속한 증가로 소외 계층에 대한 보호는 더욱 절실하다.
사회 구성원 각자는 자기위치에 따른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할 당연한 윤리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할 때 사회적 위치는 자연히 빛나 보이는 법이다. 몇 년전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국민들은 한사람이 한해에 600달러(80만원 정도)를 기부에 쓰고 한국은 10만원 정도라고 하였다. 먹고사는 걱정은 어느 정도 덜었음에도 우리사회가 나눔 생활에 이토록 인색한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생활고를 넘어선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기부 행위와 자원봉사가 아직까지 “문화”로 자리잡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남에게 드러내놓지도 않고 몸소 실천 옮긴 나눔의 문화를 보고 이번 우송 김학봉 선생의 복지재단 설립은 우리사회의 중산층 이상에 대한 사회적 의무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대한 적잖은 귀감이 되리라 생각한다.
지금 서울에서는 재력가의 날인되지 않은 자필 유언장을 두고 유족과 수탁대학간에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고 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는 사법부가 고민하여야 할 몫이겠지만 중요한 건 숭고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창 배
<한국도덕운동協 대구시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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