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을 생각하고 집안이 시끄러우면 어진 아내를 떠올린다고 한다. 누구나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면 기대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은 농경민족으로 아름다운 미풍양식을 갖고 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전통과 품앗이로 서로의 농사일을 도와주었고 마을사람들이 함께 고된 모내기를 끝내며 논두렁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였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쌀과 보리 등을 내어 그 사람을 도와주곤 했다. 나라에서는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미를 제공하였고 춘궁기에는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이를 거둬들였다. 이같이 우리민족의 심성은 참으로 고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때라도 거지가 오면 그냥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의 숟가락을 빼앗아 자녀들은 먹지 못하게까지 하면서도 거지는 먹였다. 현기영 선생의 자전적 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나오는 얘기인데 필자가 아는 사람도 그랬다. 거지가 오면 꼭 밥상에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였다고 한다.
부자가 남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정조 때 제주도 사람 김만덕 할머니는 흉년이 들자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베풀어 도민들을 살렸고 경주 최부자는 재산이 만석을 넘으면 나머지를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만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응한다고 하였으니 액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남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자연히 남을 도울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나눔의 정신이고 십시일반의 정성어린 마음이다.
대한적십자사가 내년이면 창립 100주년 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금까지 적십자회비를 모금하고 있다. 적십자는 인간의 불행을 모태로 하여 태어났으나 인류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고 있다. 전쟁터에서 생긴 부상자들을 아군과 적군의 차별 없이 구호하기 위해 생겨났던 적십자는 세계 178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전쟁터 뿐 아니라 각종 재난이 발생하는 곳이면 제일 먼저 달려간다. 적십자 이념은 한 줌의 쌀로 불행한 사람을 도와주었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잘 맞고 어려운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각종 제도를 실시하였던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정신을 잘 이어받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전국에서 모금한 적십자회비를 재원으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이 일은 전재민 및 전상자 구호, 남북이산가족재회, 태풍?수해 등의 이재민 구호, 저소득주민(소년소녀가장, 장애인, 실직자 및 결손가정 등) 돕기 등에 그치지 않고 모든 재해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제일 먼저 달려가 구호의 손길을 펼친다. 특히 지난해 영남-영동권을 심하게 강타했던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극심한 피해를 봤던 재해지역에 적십자 자원봉사원 수천명을 파견하였다. 또 수백트럭의 구호식량과 물품을 지급하여 실의에 빠져있던 이재민에게 많은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또한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참사 시에는 자원봉사원들이 현장에 지켜 앉아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데 최선을 다해 적십자 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적십자봉사원들의 노란 조끼는 사랑과 봉사 그리고 희망이다.
적십자의 활동의 재원은 적십자회비가 전부라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국가에서 자국 적십자사에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대한적십자사는 정부의 재정지원은 거의 받지 못하고 적십자회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전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적십자회비가 잘 안 걷히고 있다. 경기도 안 좋고 경기전망도 불투명한 문제도 있겠지만 회비모금이 지로용지를 이용한 자율모금으로 바뀌었는데도 큰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가 힘들고 어렵지만 적십자회비는 안 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야만 더 좋을 수 있다는 의식이 필요할 때다. 적은 금액으로 이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 각 가정에서 내는 적십자회비가 모이면 큰일을 할 수 있다. 재해를 당하면 제일 먼저 기댈 수 있는 곳이 대한적십자사이니, 적십자회비모금에 십시일반 동참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손 덕 임
<대한적십자사봉사회 포항시지구협의회장>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