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투표율이 50%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사회적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이 팽배해 있다. 특히 이같은 경향은 젊은층에서 두드러져 선거일을 “하루 노는 날”쯤으로 여기면서 우리나라 정치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그러나 85년전 이 땅의 젊은이들은 달랐다. 일제의 총칼앞에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을 핑계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외면하지도, 희망을 버리지도 않았다.
암울했던 36년간의 식민통치하에서 청년·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주체적으로 참가하였다.
오는 2월 8일은 독립선언일이다. 이 선언은 85년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제일 유학생들이 발표한 역사적인 독립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세계 언론들의 약소민족들의 독립 및 발언권 요구 보도 등이 계기가 되어 제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 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영·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 이광수를 상해로,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상하이의 망명 독립운동가들과도 연계하고 각국 언론에 그들의 뜻이 게재되도록 전달하기도 하였다.
2월 8일 당일 선언서·결의서·민족대회 소집청원서를 각계에 우편으로 발송한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선거라는 명분하에 유학생 대회를 열어 도쿄 유학생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600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은 사기와 폭력의 방법이라고 고발하면서 한일합병조약의 폐기와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하여 이를 실현하기 까지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이 날 행사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10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으나 그 후에도 유학생들의 운동은 계속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약 360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귀국하여 합류하였다.
투쟁적이고도 분석적·비판적이었던 이들의 독립선언은 국내의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국내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였다.
2·8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한 문헌이었으며 “정당한 방법으로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이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것이며 또한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고 주장하여 무단통치하에서 신음하는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3·1독립선언서보다 한층 더 절실하게 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까지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던 그 분들을 생각하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나라를 버리는 이민열풍이 불고있는 현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2·8독립선언 선포 85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의가 진정한 평가를 받고 그 정신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면면이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바란다.
변 석 현
<대구지방보훈청장 직무대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