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광야’ 뒷부분. 만년에 지어놓고 세상에 내놓지 못했었는데, 해방되던 해 12월 동생 ‘원조’가 ‘문예신보’에 발표한 작품이다. 숨막히는 세월속에서도 白馬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시인의 민족적 염원이 담겨 있다.
“말은 가자 울고 님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님아 가는 나를 잡지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 이 멋진 연시를 지은 시인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티끌길 東西로 떠도는 몸/외로운 채찍 여윈 말 고생도 많았지/ 돌아감이 좋은 줄 모르지 않지만/ 돌아간들 집이 또한 곤궁한 것을” 최치원선생이 중국 科擧 급제후 말을 타고 중국땅 여기저기를 떠돌던 시절 고국을 걱정하며 지은 시이다.
유럽이나 중국 인도 일본 사람들은 말고기를 먹지만, 인도인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 것처럼, 한국인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 말을 그만큼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집에서 부리던 말이 죽으면 꼬리와 갈기의 긴 털을 뽑고 고이 묻어주었다.
말총은 冠을 만드는 필수원자재였다. 망건과 탕건을 만들고 벼슬아치들의 관모를 지었으며, 임금이 쓰는 익선관도 말총으로 만들었다. 왕조시절 사람들은 머리에 쓰는 관을 매우 소중히 여겼으니 그 관을 짓는 말총은 귀한 것이고 따라서 말도 귀한 존재였다.
지금은 ‘수의사’‘물고기 의사’가 있지만 조선조에는 ‘馬 專門醫’가 따로 있었다. 병든 말을 위해 전문약재를 개발하고 침을 놓아주며 뜸을 뜨기도 했으며, 목장을 돌아다니며 목장관리인에게 馬病 진료법을 가르치기도 하는 醫員이었다.
말 사회는 철저히 母系사회라 한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말이 모두를 통제한다. 씨받이 숫말을 ‘간택’하는 권한도 암말에 있다. 숫말들은 그저 가슴을 조이며 처분만 기다릴 뿐이다.
말의 세계는 ‘女馬天國’인데, 사람들은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 는 말도 안되는 험담을 하는 통에 말띠해에는 딸을 잘 낳으려하지 않는다. 공연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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