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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청시대, 낙동강을 가다 - 20. 영천 금호강

정몽주·최무선 낳고 비옥한 금호평야 살찌운 영남 역사·문화의 보고

김정모 논설위원 kjm@kyongbuk.co.kr 등록일 2015년08월20일 22시16분  
▲ ▲ 경주 모자산과 포항의 죽장 가사령, 기북 성법령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의 제2지류 금호강이 영천 시가지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금호강(琴湖江)은 경주 모자산과 포항의 죽장 가사령, 기북 성법령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의 제2지류다. 금호평야와 경산, 대구를 만든 탯줄이다. 본류 길이는 118.4㎞로 낙동강 전체 유역면적의 약 9.2%를 차지한다.

금호강은 발원지에서 흘러나와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영천시내 동북쪽 보현산 자락에서 영천 자양댐을 만들고 북안천을 받은뒤 영천시내 서북쪽 상류에서 고현천과 신령천을 합수하면서 제법 강 다운 모습을 갖춘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금호강 유역은 현대에 와서 상전벽해가 됐다. 금호강 유역의 1985년과 2000년의 토지이용도만 봐도 도시적 토지이용면적은 매우 증가한 반면, 초지와 논, 밭의 면적은 약 100㎢ 정도 감소했다. 그만큼 도시화와 산업화가 됐다. 또 포항제철의 용수공급을 위해 1980년 영천댐이 조성되자 강물줄기가 약해지고 경산, 대구 주변의 도시화로 환경문제 해결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대두되고 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분지가 많지만 영천(永川)은 전형적인 분지 도시다. 태백산맥의 지류인 보현산(1천124m)과 팔공산(1천193m), 운주산(806m)이 둘러싸여 지역전체가 하나의 분지를 이루고, 그 가운데로 여러 줄기의 금호강 상류가 흘러 비옥한 평야를 형성한다. 농경시대 기준으로는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영천을 조선시대의 풍수가 격암 남사고가 경상도의 3대 길지로 손꼽은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팔공산 동측 자락을 끼고 있는 금호강 상류 영천의 산간계곡에는 사찰과 못(저수지)이 많기로 유명하다. 조계종 10교구 본산이자 절터가 고즈넉한 운부암 등 8개 암자를 거느린 은해사와 647년(신라 진덕여왕)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오래된 사찰 수도사가 있다. 영(靈)발이 있어서인지 기독교 유적으로도 경북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한옥교회인 자천교회(문화재자료)도 자리잡고 있다.

금호강 상류 임고면에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임고서원이 있다. 757년(신라 경덕왕) 임고군으로 개칭했으니 예부터 고을의 중심지가 아니었나 싶다. 차기 여당의 대권후보를 노리는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의 고향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인구가 1천만이 안되었는데 1천만이 넘는 한국 최대 지방정부 수장으로 민선 경기도지사 중 유일하게 재선 8년을 지냈으니 정치적 무게가 가볍지 않다.

영천의 정기를 타고 금호강의 생명수를 먹고 자란 대표적 역사 인물은 정몽주와 함께 최무선을 꼽을 수 있다. 고려말 국난기 정몽주와 동시대를 산 최무선(1325~1395). 그는 여말 화통도감에서 화약과 각종 화기를 자체적으로 제조했고,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집에서 화약수련법, 화포법을 저술한 군사발명가다.

그는 임진왜란 보다 2백년 앞서 1380년(우왕) 충청도 진포(금강하구, 충남서천)에 왜구(일본)가 초대형 선단으로 침략하자 부원수로 출전하여 고려 군선 100여 척에 장착한 최신 무기 화포 화통 공격으로 왜선 500여척을 전멸시키는 불멸의 전공을 세웠다. 군선으로 함포공격이 감행된 세계 최초의 해상전투다. 1383년(우왕) 경상도 관음포(남해)에 침입한 왜구도 격파했다.

그로부터 약 5백년 뒤 19세기 후반 일본의 함포 앞에 굴복하며 맺은 불평등한 병자(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은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19세기 서구열강의 함포는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의 첨병이어서 '함포외교'라 하는데, 최무선의 업적을 계승하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이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단심가의 주인공 포은 정몽주(1338~1392)는 고려 조선 1천년을 통틀어 왕조에 대한 충신을 꼽으라면 단연 으뜸이다. 영일 정씨로 외가(영천 이씨)인 영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본가인 영일군(현 포항시)을 거쳐 개경(개성)으로 상경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으로 있을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몰아내 개경을 수복하고서도 부원(附元)간신배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낸 이가 청년 정몽주였다. 그가 개혁정치가로 나서기로 결심한 것은 정치적 대부 김득배가 횡사(橫死)했을 때였으리라 추측된다. 그가 이 때 지은 '제김원수득배(祭金元帥得培·원수 김득배를 제사지내며)'라는 제문은 중국 3대 명문으로 꼽히는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에 비해서 손색이 없는 명문이다.



"아, 슬프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개 들으니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淫)한 이에게 화(禍)를 주는 것은 하늘이며,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니,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치는 같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그 이치가 정해지면 사람한테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한테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옛날에 홍구홍구(紅寇)가 짓밟고 들어올 때,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난 갔으니 국가의 명이 위태함이 실끝 같았는데, 오직 공이 대의를 수창(首唱)했으므로 원근이 메아리처럼 응하였다. 몸소 일만 번이나 죽을 꾀를 내어서 능히 삼한(三韓)의 업을 회복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인가. 비록 그 죄가 있다 하더라도 공(功)으로써 죄를 감하는 것이 옳고, 만일 죄가 공보다 무겁다면 반드시 돌아와 죄에 자복하게 한 연후에 죽이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지 아니하고 개가(凱歌)를 마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을 도로 칼날의 피로 만드는고. 이것을 내가 피맺히게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나는 안다. 그 충혼과 장백(壯魄)이 천추만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명이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포은은 문신이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국방을 위한 전쟁 지휘관이었다. 이성계와 함께 동북면(함경도)에서 여진을,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각각 토벌했다.

포은은 또 외교관이었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인임 지윤의 친원(親元)외교노선을 반대하다가 유배됐다. 그들의 추천으로 사지인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에 건너갔으나 왜구에게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자진해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관철시키는 등 역전의 외교관이었다.

포은은 또 정치가였다. 수도에는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했다.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고, 신법률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여말 역성혁명을 하려는 이성계 정도전 조준 남은을 제거하려 하다가 이방원(태종)의 자객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살해됐다. 이 대목에서 누구나 의문을 가진다. 천도(天道)는 과연 있는 것인가….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수장되고 13일 동안 황해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명나라 배에 의해 구조됐던 그 역시 비명에 갔다. 영천이 15만 여명의 초급장교를 양성한 육군3사관학교와 국립 영천호국원으로 호국의 고장이 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금호강은 영천시가지에서 남하하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호읍을 지나 와촌에서 청통천을 받아 경산시 하양읍을 지나며 장중히 흐른다. 포항 경주 영천의 골짝 골짝에서 모인 물은 포항시와 금호강 중하류 금호·경산평야에 생명수로 기꺼이 내주고 있다.

가장 별이 잘 보이는 곳으로 선정된 보현산에 천문과학관과 천문대가 있어 영천시는 별(star)의 도시임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별은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천은 이상향을 추구한다. 영천시의 '영(永)자'처럼 유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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