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태평성대 기틀 마련한 명재상의 철학·사상 '물씬'
그 가운데 부호리 금호서원은 금락리 금호서원보다 빠른 1913년에 복원한 서원이다.
성경재와 마주 보는 마당 우측의 경사진 대지 위에는 사당(祠堂)이 배치돼 있는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方形)의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했으며 담장의 정면에는 3칸 규모의 평대문(平大門)인 내삼문(內三門)을 세웠다.
강당인 수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야트막한 자연석 기단 위에 운두가 낮은 평편한 주초(柱礎)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했다. 평면은 어칸(御間)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退間)을 두었다.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지붕의 양측면에는 풍판(風板)을 설치하였으며 내부에는 통칸(通間)으로 처리했다.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집이며, 가구는 3량가(三樑架)이다.
금호서원은 문경공(文敬公) 경암 허조(許稠)를 봉양하는 서원이므로, 서원 앞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허조는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황희와 함께 세종 30년간을 태평성대로 이끈 조선 왕조의 명재상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經濟元)’과 ‘속육전(續六典)’을 수찬했으며, 유교국가의 통치이념인 ‘국조오례의’와 ‘사례의’를 찬정하고 석전의식을 개정했다. 또한 성균관 학사와 사부학당을 세웠다’
경암 허조는 1369년 4월 11일 경상도(慶尙道) 하양현(河陽縣) 금호동(琴湖洞) 구제(舊第)에서 출생했다.
휘(諱)는 稠, 호(號)는 敬庵, 시호(諡號)는 文敬, 관향(貫鄕)은 하양(河陽)이며, 22세에 문과 급제했다.
경암은 방촌 황희(尨村 黃喜)와 함께 세종조를 대표하는 현상(賢相)으로, 세종선치(世宗善治)의 기반을 닦은 명상(名相)이며 한국역사상 드물게 보이는 세종 30년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연출한 대정치가(大政治家)이자, 대유학자(大儒學者)로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이다.
경암은 석전의식(釋典儀式)을 개정했고 종묘 사직제례(宗廟社稷祭禮)와 예악(禮樂), 왕·왕비의 상장제례(喪葬祭禮), 사서인(士庶人)의 상장제례(喪葬祭禮) 등 각종 의식(儀式)은 경암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종 8년에는 육조(六曹)의 기본법전인 ‘속육전(續六典)’을 수찬(修撰)하고 국가의 의례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으며, 사서인(士庶人)의 ‘사례의(四禮儀)’를 제정했다.
세종 16년에는 ‘집성소학(集成小學)’과 ‘선원록부록(璿源錄附錄)’ 및 ‘성리학군서(性理學群書)’를 편찬·간행했다.
세종 20년(1438)에 우의정, 21년에 좌의정으로 승진됐으며 1439년 12월 28일 71세로 별세해 1452년 2월 세종묘정(世宗廟廷)에 배향됐다.
숙종 10년(1684) 하양현(河陽縣) 금호동(琴湖洞)에 금호서원을 창건해 위패를 봉안하고 정조 14년(1790) 2월에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2003년 10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