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서원(臨川書院)은 안동시 송현동 호암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2010년 3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조선 선조 때 문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단향으로 모신 안동 내의 유일한 서원이다. 김성일은 1593년(선조 26)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수명을 다했다. 14년 뒤인 선조 40년(1607)에 선생의 학덕과 공훈을 기려 일향의 선비들이 선생의 상자지향(桑梓之鄕)에 조두지소(俎豆之所)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 따라 당시 안동부사로 와 있던 한강 정구가
황금 닭 마주하며 알 품는 금계포란(金鷄抱卵) 명당으로 이름 높은 봉화군 유곡리 닭실마을에 삼계서원(三溪書院·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17호)이 있다. 수백 년 세월 충재 권벌(1478~1548) 선생 가문의 집성촌으로 이어진 마을은 석천정사, 추원재, 청암정 등 소중한 유교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삼계서원(三溪書院) 닭실마을로 오르는 옛길 초입부분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종대 명신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1년(1588)에 건립됐다. 선조 31년(1601)에 한강 정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에 있는 낙봉서원은 1647년(인조 25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숙자(金叔滋)·김취성(金就成)· 박운(朴雲)· 김취문(金就文)· 고응척(高應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787년(정조 11년)에 ‘낙봉(洛峰)’이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가 그 후 1933년에 강당을, 1943년에 외삼문을, 1977년에 사당을, 1989년에 동재를, 19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지어 복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797번지 강평(江坪)마을에 있는 자동서원은 1만6500㎡(500여 평)의 땅에 담장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구분했으며,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다. 강학 공간에는 제창문, 현판이 달린 대문이 있고 자동서원 현판이 달린 강당에는 양선재(養善齋) 육영재(育英齋)가 있다. 외삼문 앞에는 수호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풍수적 입지를 고려하여 건축된 자동서원은 그 위치한 곳이 용이 뒤틀린 형상으로 근처에 인공 연못을 조성했다.자동서원(紫東書院)은 ‘자양산(紫陽山) 동쪽에 있다.’, 제창문은
△퇴계 이황을 모시기 위해 처음 세워진 여강서원. 여강서원(이후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을 봉안하고 선비를 기르기 위한 강학의 기능을 담당하고자 1575년에 건립됐다. 1576년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했다. 퇴계 선생을 봉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서원의 규모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대표서원이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사당인 존도사가 6칸, 신문 3칸, 신주 5칸, 강당인 숭교당 15칸 등 92칸이나 됐다. 그러나 여강서원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1606년 북쪽으로 100보 위치에 중창했다. 처음
△‘250년 후손들의 세거지에 자리 잡다’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봉산마을은 2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산이씨 세거지이다. 그리고 마을 뒤편 산자락 경사지에는 한 서원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 서원은 마을 주민들에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 같은 존재이다.서원의 명칭은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마을 주민들의 선조인 조선중기 인물 이사룡(1595~1641)을 배향하고 있는 문중서원이다. 서원 명칭의 ‘옥천’은 이사룡이 평소 살던 곳에서 유래하였다.산록 경사지에 남향하여 위치한 서원은 그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여, 높게 쌓
하회마을을 품은 화천서원(花川書院). 안동 하회마을의 부용대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하회마을의 기운을 담은 서원이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서 안동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 64m의 절벽이다. 이 부용대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옥연정사에서 왼편으로 산기슭을 따라 동북쪽 방향으로 가면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이름은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 지류의 이름 ‘화천’을 딴 것이다. 서원은 조선중기 퇴계 학문을 수학한 문경공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을 기리고 인재를 양성
하로서원(賀老書院)은 벽진이씨 집성촌인 김천시 양천동 829번지 하로 마을에 있는 서원으로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을 배향하기 위해 1984년 노촌당(老村堂) 옆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면서 하로서원으로 개창했다. 하로서원의 근원은 1648년(인조26)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경렴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약동 등 3인을 제향했다.1673년(현종14) 인근의 이아리(爾雅里)로 옮기면서 동대(東臺) 최선문(崔善門), 남정(嵐亭) 김시창(金始昌)을 추향(追享)하고 175
신천서원은 경북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에 김영렬(1370~1404)의 유지를 받들고 후손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시설이다. 김영렬의 자는 열지(烈之), 호는 맹암(孟巖), 시호는 양소(襄昭), 본관은 의성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제5자 김석(金錫)의 9세손인 김용비(金龍庇)의 손자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고려전서로 태조 을해에 등과해 1394년(태조 3년)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됐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해 1397년 파직돼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지방도 치산 관광길을 따라 팔공산 지맥의 치산계곡 쪽으로 가다 보면 치산 마을 맞은편 좌측 산허리에 있는 자그마한 서원이 바로 귀천서원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탈환 등 의병활동으로 1등 공신 반열에 오른 의병장 ‘충의공 권응수(權應銖) 장군’을 흠모한 후손들이 향사를 지낸 서원이다. 귀천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 영남 지역에서 큰 공을 세운 백운재(白雲齋) 권응수(1546~1608년) 장군과 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을 배향한 서원으로 조선 1676년(숙종 2)에
군위군 우보면 봉강서원(鳳岡書院)은 1461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장손(長孫) 이며, 의성현령(義城縣令) 이던 문승노(文丞魯)는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멀리 산청까지 갈 수가 없었기에 조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 만천동(사람들이 ‘봉강서원’이라 불렀다고 전함)을 창건하여 봉안해 왔으나 난화(亂火)로 2차에 걸쳐 소실(燒失)되었다.승노(丞魯) 공께서 의성 현감으로 계실 때 금성면 제오리에서 목화를 시험 재배해 토질이 적합함을 알고 목화재배를 권장해 의성군이 목화의 주산지가 되었고, 이러한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양지마을 섬계천(봉곡천)변에 있는 섬계서원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02년(순조2) 지방 사림이 주동이 되어 창건했다. 서원 이름을 섬계(剡溪)라 한 까닭은 이 마을 이름이 섬계리(剡溪里)였던 데서 비롯된다. 지금은 조룡리로 바뀐 섬계리는 김문기를 중시조로 하는 김녕김씨 집성촌이다. 성균관대사성 이노춘(李魯春)이 쓴 상량문과 1898년 송근수(宋近洙)가 쓴 백촌선생원허비(白村先生院墟碑)에는 김문기와 그 맏아들 여병재(如甁齋) 김현석(金玄
사빈서원은 의성김씨 중흥조 청계 김진(1500~1580)선생과 그의 다섯 아들(약봉·귀봉·운암·학봉·남악)의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숙종 36년(1710)에 사림과 후손들이 건립했다. 그러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가 지난 2011년 143년 만에 복원된 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로 이건 했다가 2007년 다시 지금의 임하면 천전2리로 옮겼다. 1985년 8월 5일 경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다.현재 선비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서쪽에 위치한 삼릉을 지나 울산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내남면 이조리가 나온다. 천룡산 자락인 고위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조마을은 경주 최씨의 유서 깊은 동족 마을이다. 형산강을 가로지르는 이조교를 건너기 전 왼쪽 길을 따라 들어서면 전형적인 농가주택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 마을 제일 안쪽에 다다른다. 마을 끝에는 수령이 300년은 넘어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이 바로 정
사양서원(泗陽書院)은 화해사(華海祠)로 1888년(고종 25)에 건립되었다. 신현(申賢)[1298~1377], 신용희(申用羲)[1315~1382], 원천석(元天錫)[1330~?]을 배향하고 있다. 신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신경(信敬), 호는 불훤재(不?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용희의 본관은 평산, 자는 문엽(文曄), 호는 간재(簡齋)이다. 신현의 장남이다. 원천석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위치 사양서원을 가려면 파천면사무소 입구에서 청송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1㎞ 이동 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立巖書院)은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그의 네벗(立巖四友)인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을 배향하는 서원이다.경북서원지와 입암서원약설 등에 따르면 1657년(효종 8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셨다.이어 1713년(숙종 29년)에는 권극립·정사진·손우남·정사상을 추향하게 됐다.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 일익을 담당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 뇌성산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한 광남서원(廣南書院)은 영의정으로 단종을 보좌하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에 살해된 충정공(忠定公)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과 그의 두 아들 참판공(參判公) 석(錫)과 직장공(直長公) 흠(欽)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경북서원지 등에 따르면 이곳은 1791년(정조 1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황보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시고 세덕사(世德祠)라고 불렸다.1831년(순조 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賜額)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
조선시대 경북 성주지역을 대표하는 큰 스승인 한강 정구의 문인록인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는 342명의 문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자가 자신들에게 맞는 분야에서 활약함으로써 한강학파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즉 어떤 문인들은 학자로서 대성한 사람도 있고, 관료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사람도 있으며, 향촌에서 스승을 보좌하며 사문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인물도 있었다.성주군 월항면 유월리에 있는 덕암서원은 정구의 문인으로서 평생을 사문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인물들인 삼익재 이천배(1558∼1604),
구암서원은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에서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보존이 잘 된 서원으로 꼽힌다. △애민정신 실천의 상징 구암서원.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
고산서원은 조선 후기 유학자인 이상정(1710~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암산유원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서원은 1768년(영조44) 대산 이상정 선생이 고산정사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을 한 터전에 선생이 돌아가신 후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이후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이후에는 향사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