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35. 성주 덕암서원
[서원] 35. 성주 덕암서원
  • 권오항 기자
  • 승인 2019년 04월 24일 17시 27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4월 25일 목요일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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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사문의 발전·확장 일평생 헌신
덕원서원 전경

조선시대 경북 성주지역을 대표하는 큰 스승인 한강 정구의 문인록인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는 342명의 문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각자가 자신들에게 맞는 분야에서 활약함으로써 한강학파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즉 어떤 문인들은 학자로서 대성한 사람도 있고, 관료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사람도 있으며, 향촌에서 스승을 보좌하며 사문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인물도 있었다.

성주군 월항면 유월리에 있는 덕암서원은 정구의 문인으로서 평생을 사문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인물들인 삼익재 이천배(1558∼1604), 백천 이천봉(1567∼1634), 그리고 여헌 장현광의 문하로서 여헌학파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인물인 학가재 이주(1599∼166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정성 들여 세운 서원이다.

이렇듯 세 인물을 함께 배향한 서원을 세운 것은 경산이씨 한 문중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인물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스승을 보좌하면서 어려운 일도마다 하지 않고 사문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한 것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덕원서원 현판

△검암산 아래 넓은 터에 자리 잡다.

덕암서원은 1672년(현종 13)에 덕암사를 건립한 것에서 연유한다. 그 후 고종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6년(고종 13)에 덕암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지금의 서원 명칭은 1998년에 사당, 내삼문, 동·서재 등이 건립되어 이듬해에 서당을 서원으로 개칭한 것이다. 서원은 1994년 4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덕원서원 강당(성학당)

서원은 성주군 월항면 유월리와 안포리에 걸쳐 있는 검암산 아래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근래에 건립한 이천배, 이천봉, 이주 3현의 유허비를 위시한 경산이씨 문중의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고, 이를 지나치면 서원의 2층 누각인 관항루(觀恒樓)가 있다. 서원의 주 출입구인 솟을삼문 형태의 건명문(建明門)을 들어서면 남동향으로 강당인 성학당(聖學堂)이 위치하고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강당 뒤편에는 별도의 구역을 두고 내삼문과 사당인 경현사(景賢祠)가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규모에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둔 형태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측면 1칸, 사당은 정면 3칸·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되어 있다.

한편 서원에 배향된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이고, 이주는 이들과 숙질간으로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인 경산이씨의 3현으로 추숭 받고 있으며, 서원이 위치한 곳은 그들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백인당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강의 문인들이 수집 간행한 한강선생언행록(19세기경 간행)-“여기에 백천·이천봉이 함께 하였다”

△이천배와 금호선사선유(琴湖仙査船遊).

이천배는 25세 무렵에 한강문하에 입문했고, 이후 20년 동안 한강의 각별한 관심과 기대 속에 스승을 보좌하면서 한강학의 수용과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과거에 뜻을 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명성이 날로 높아져 여러 번 벼슬길에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장현광, 서사원, 여대로 등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들과 회합 교유하였는데, 그들의 회합·교유하는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1601년에 이루어진 선유 모임이었다. 흔히 “금호선사선유”라 일컬어지는 이 선유에는 이천배를 비롯하여 모두 23명의 선비가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강과 여헌의 문인이었다. 이들은 선유를 통해 학문적 원기를 재충전하는 휴식시간을 갖는 것과 함께 서로 간의 연대와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같은 사문을 공유하는 선비들의 단합하는 자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천배를 위시한 23명의 선비가 금호강 선사에서 낙동강 부강정에 이르는 선유를 즐긴 사실을 그린 금호선사선유도

△한강학파 외연 확장의 산파 이천봉.

이천봉은 형인 이천배보다 9살이 어렸던 관계로 14세에 부친이 사망한 이후 형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하였고 함께 한강의 문하에 입문하였지만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형에 비해 오랫동안 살면서 스승인 정구를 현양하고 한강학파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스승에 명에 따라 형인 이천배와 함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성주지역 최초의 서원인 천곡서원 중건의 실무를 담당하였고, 건강상의 이유로 잦았던 정구의 온천 욕행을 기획·추진함과 더불어 거의 대부분 참여하였다. 또한 정구가 생을 마감한 후에는 회연서원 창건, 신도비 건립과 문집간행 등을 주도하였다.

한편 이천봉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덕암서원 초입부에 최근 건립한 이천배,이천봉,이주 유허비

△‘여문십철(旅門十哲)’ 이주.

이주는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그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공자의 제자들을 본떠 지칭한 ‘여문십철(旅門十哲)’의 칭호를 받은 인물로 평생을 학문에 힘쓰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처음 과거에 뜻을 두어 향시에 합격한 뒤 회시의 과장에 나갔으나, 과거가 난잡함을 보고 벼슬길에 대한 뜻을 끊고 학문연구에 매진하며 스승의 행적을 성실히 기록하는 등 여헌학파의 계승·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한강 정구가 남긴 모범에 따라 여씨향약을 본받아 동규(洞規)를 지어 교화에 힘쓰며 풍속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특히 이주는 후학을 지도하는데 능하여 많은 석학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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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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