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국보훈의달' 배수용 장사전투참전용사 대구지회장
[인터뷰] '호국보훈의달' 배수용 장사전투참전용사 대구지회장
  • 류희진 기자
  • 승인 2019년 06월 02일 20시 12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6월 03일 월요일
  • 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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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성공 위한 양동작전…장사상륙작전, 6·25 전세 역전 교두보
"포화 속으로 돌격…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마음밖에 없었죠"
배수용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
배수용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

‘문산호’가 장사 앞바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륙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부산항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바다는 어느새 파도가 배 위까지 오를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배 한편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부대장의 ‘상륙 시작’이라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우리들은 바다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명의 전우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뛰어내린 가운데 몇몇은 파도에 휩쓸려 군함 밑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기 살기로 헤엄쳤다.

가까스로 도착한 모래사장에서는 더욱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새벽,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적들이 무수한 총탄을 쏟아붓는 상황에 함께 도착한 전우들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중 등 쪽이 화끈하더니 이윽고 양쪽 허벅지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아픈걸 보니 아직 내가 죽진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수 시간에 걸친 교전이 계속되는 중 더해진 아군의 함포와 비행기의 지원사격 이후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오전 9시 무렵 엎드리고 있던 몸을 처음으로 일으켜 세워 주변을 둘러보자 하늘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찼고 우리가 타고 왔던 함선은 적의 폭격에 좌초돼 있었다.

죽은 전우들을 묻을 틈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감상에 젖을 틈도 없다. 작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상륙에 성공한 이후 6일간 치열한 교전이 이어졌다. 애초에 이번 작전은 3일 안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식량 등 보급품은 이미 다 떨어진 상황.

민가에 무턱대고 찾아가 밥을 얻어먹는가 하면, 산에서 나무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눈앞에 적군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싸웠다.

장사전투참전용사회 대구지회장 배수용씨가 받은 충무공 훈장 사본이 벽에 걸려있다.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그 결과, 내가 속한 ‘육본직할 제1유격대대’는 장사리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인민군 270명을 소탕하고 교두보를 확보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당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5사단과 2군단, 전차 4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말 그대로 총알이 귀 옆을 스쳐 지나가던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죠.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배수용 장사전투참전용사회 대구지회장(94·사진)이 1950년 9월 15일 한국전쟁 당시 투입됐던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전쟁 당시 26살이었던 배수용 지회장은 고향 영덕에 부인과 가족을 남겨둔 채 대구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북한 인민군이 멈출 줄 모른 채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배 지회장은 대구역 광장에서 유격대원을 모병하던 군 관계자에게 자원입대를 신청해 경남 밀양에서 훈련을 받았다.

상륙작전에 투입된 제1유격대대는 772명의 병사로 구성됐다. 이 중 80%에 달하는 600여명이 18∼19세 학생에 불과했고 15세의 어린 학생도 일부 포함됐다.

그는 “한참 어려 보이는 학생 수백 명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 담긴 눈빛을 띄며 모여 있었다”며 “그 눈빛을 본 순간, 나이가 많고 적음은 호국정신에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사전투참전용사회 대구지회장 배수용씨가 충무공 훈장과 화랑 훈장을 포함한 다양한 훈장들을 공개하고 있다. 박영제 기자 yj56@kyongbuk.com

그러나 부대가 급하게 꾸려진 만큼 교육 기간과 보급품의 양 또한 굉장히 부족했다.

이들은 8월 27일 편성 당일부터 약 2주가량 동안 체력, 정신교육 위주의 기본 교육만 받고 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이 작전은 3일 안에 끝날 것으로 계획된 탓에 3일 치의 전투물자만 지급됐다. 하지만 예상보다 전투가 길어진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사태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크게 부족한 건 당연지사였다.

배 지회장은 “생사를 초월한 전투 끝에 살아 돌아온 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작전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며 “부대원들은 장사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에야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돼 자신들이 속한 부대명을 뒤늦게 알게 됐지만 우리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이어 “모든 이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이면에는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유격대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몸을 던진 전우들이 없었더라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과는 또 다른 모습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배 지회장은 점차 희미해지는 호국정신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약 70년이 흐르며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나 그만큼 안보의식 등 국가관은 등한시되는 현실에 놓여있다”며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 공동의식을 갖고 서로 협력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수 있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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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진 기자
류희진 기자 hjryu@kyongbuk.com

포항 남구지역, 의료, 환경, 교통, 사회단체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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